국립창극단 단원들이 오는 11일 개막을 앞둔 ‘트로이의 여인들’의 한 대목을 연습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오는 11일 개막을 앞둔 ‘트로이의 여인들’의 한 대목을 연습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저를 당신 앞에 끌고 올 필요는 없었어요. 당신을 본 순간, 저는 당신에게 달려오고 싶었으니까요. 당신은 절 미워해도, 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원했어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지난달 28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연습실. 오는 11~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창극단의 신작 ‘트로이의 여인들’ 연습이 한창이었다.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가 애절하게 창(唱)을 하며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에게 매달렸다. 메넬라우스는 “요 작것을 어치케 쥑여야 잘 쥑였다고 소문이 나끄나?”라고 벼르며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반해 ‘사랑의 도피’를 한 헬레네를 찾아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트로이의 여인들은 “저년 말을 듣지 마오. 어서어서 죽이시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 헬레네의 아름다운 모습과 구슬픈 가락에 메넬라우스의 마음은 어느새 녹아내리고 만다.

고대 그리스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창극으로 재탄생한다. 국립극장의 2016~2017 시즌에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판소리 명창 안숙선이 작창하고, 국악에 정통한 음악감독 정재일이 곡을 썼다. 맛깔스러운 대사를 구사하는 작가 배삼식이 대본을 썼다. 연출은 세계적 무대연출가인 옹켕센 싱가포르예술축제 예술감독이 맡았다. ‘창극 드림팀’으로 불릴 만한 창작진이다.

이번 작품의 가장 큰 파격은 트로이를 무너뜨린 ‘팜파탈(요부)’ 헬레네 역을 ‘창극 아이돌’로 불리는 남자 배우 김준수가 맡은 것이다. 그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준수가 메넬라우스의 마음을 돌려놓고 요염한 자태로 웃으며 퇴장하자 지켜보던 배우들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안 명창은 그의 요염한 연기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조언을 덧붙였다. “소리를 하면서 여자 흉내를 낼 필요는 없어. 몸짓으로 표현하면 될 것이야.” 옹켕센 감독은 “스파르타를 도망쳐 트로이로 온 헬레네가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성(無性)’의 존재로 그려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배 작가는 원작과 장폴 사르트르가 개작한 동명 작품을 바탕으로 극본을 썼다. 트로이 왕가의 여인들이 그리스로 끌려가기 전 느끼는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는 절박한 감정에 주목했다고 했다. 안 명창은 여기에 판소리 특유의 한(恨)을 담아 소리를 입혔다. 정 음악감독은 소리꾼과 고수 두 사람이 판을 이끌어나가는 판소리의 형식을 살린다. 합주보다는 배역별로 지정된 악기가 소리꾼과 짝을 이뤄 극의 서사를 이끌도록 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의 장엄한 목소리에는 거문고,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의 목소리는 대금과 어우러진다. 이방인인 헬레네의 소리는 피아노 연주와 함께한다.

안 명창과 정 음악감독이 선보이는 국악과 양악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주연 배우들이 창을 할 때는 풍부하고 깊은 판소리로 여인들의 한을 날것 그대로 전달하고, 코러스 부분에선 격정적인 피아노 연주를 통해 긴장감과 급박함을 고조시키며 비극성을 심화시킨다. 옹켕센 감독은 “기악에 의존하는 서양음악과 달리 판소리는 소리 자체가 굉장히 풍부하고 역동적이라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며 “극의 핵심적 분위기인 긴장감과 급박함을 풍부하게 표현해내는 정재일의 음악도 판소리와 궤를 함께한다”고 설명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로서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을 지닌 헤큐바 역은 김금미가 맡았다. 트로이 군대의 수장이었던 남편 헥토르를 잃고 아들을 지키는 안드로마케는 김지숙, ‘태양의 신’ 아폴론과 적장 아가멤논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저주받은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는 이소연이 연기한다. 2만~5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