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사라예보, 유럽의 거리에서 모스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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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여행
"탕!"…1차 세계대전 '신호탄' 울린 라틴 다리
시청 옆 올드타운 들어서면 이슬람식 카페·상점들이 빼곡
대부분 오스만 제국의 유산
걷다보면 주변 풍경 달라져
모스크 대신 유럽풍 석조건물…4개 종교 문화가 한 곳에 공존
내전의 아픔 고스란히…길바닥 곳곳 포탄 흔적 "사라예보의 장미라오"
1990년대 사라예보 포위전으로 1만여명 민간인 목숨 잃어
탈출용 터널엔 전쟁의 상흔 생생
'노란 요새' 주타 타비야 오르니 석양 속 사라예보 전경 한눈에
"탕!"…1차 세계대전 '신호탄' 울린 라틴 다리
시청 옆 올드타운 들어서면 이슬람식 카페·상점들이 빼곡
대부분 오스만 제국의 유산
걷다보면 주변 풍경 달라져
모스크 대신 유럽풍 석조건물…4개 종교 문화가 한 곳에 공존
내전의 아픔 고스란히…길바닥 곳곳 포탄 흔적 "사라예보의 장미라오"
1990년대 사라예보 포위전으로 1만여명 민간인 목숨 잃어
탈출용 터널엔 전쟁의 상흔 생생
'노란 요새' 주타 타비야 오르니 석양 속 사라예보 전경 한눈에
사라예보의 총성, 비극의 신호탄이 되다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이중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시청사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오전 10시 라틴 다리 앞을 돌던 그때,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방아쇠를 당긴 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저항하는 비밀결사단 소속 19세 세르비아 청년이었다. 이 사건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다.
유럽에서 느끼는 이슬람의 정취
올드타운은 시간을 두고 골목골목을 여유롭게 살펴보는 것이 좋다. 골목 구석구석에 진귀한 오스만제국의 유산이 포진해 있다. 바슈카르지아 중앙에는 세빌리 샘이 있다. 조촐하지만 올드타운의 상징이자 만남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곳의 샘물을 먹으면 사라예보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메인 거리인 사라치 거리로 내려오니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사원으로 여겨지는 가지 후스레브 베그 모스크, 시계탑, 상인들의 여관이던 타슬리한, 오스만제국 전통시장인 베지스탄 등의 유적이 있다. 방향을 틀어 카잔드지룩 거리에 들어선다.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중 하나다. ‘장인의 거리’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구리, 주석, 은 등으로 만든 온갖 수공예품의 향연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치 오스만제국의 어느 골목으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마저 든다.
공존과 대립을 넘나드는 거리
보스니아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다. 6~7세기 슬라브인들이 정착한 이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민족은 이 땅에서 함께 살아왔다. 종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가 주였지만, 400년이 넘는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 이슬람교가 깊게 뿌리를 내렸다. 1429년 레콘키스타 이후에는 추방당한 유대인이 대거 몰려들기도 했다. 사라예보가 발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4개의 종교가 한 도시에 공존하는 곳은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사라예보가 유일하다.
카페에 앉아 거리를 바라본다. 동쪽의 모스크에서는 아잔이 들려오고, 서쪽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칼로 벤 듯 나뉜 거리 위로 히잡을 쓴 회교도 여인, 교회로 향하는 신도,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걷는다. 오랫동안 함께 걷던 이들이 왜 피를 흘려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800m 터널, 도시의 생명줄이 되다
군수물자는 물론 식량, 물 등 모든 보급로가 끊긴 사라예보에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그때 보스니아군과 시민들은 삽자루와 곡괭이를 들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사라예보부터 공항 뒤편 자유 보스니아 진영이 있는 곳까지 활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약 4개월간의 사투 끝에 1993년 7월30일, 드디어 사라예보의 터널이 완성됐다.
가이드와 터널 박물관을 찾았다. 그의 이름은 마르코, 사라예보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다. 터널로 가는 길은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스나이퍼 앨리라 불리는 ‘보스니아 용’ 대로에 잠시 멈춰 섰다. 사라예보 포위전이 스브레차 대학살과 함께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된 이유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높은 빌딩이나 산에 숨어 이 대로를 건너는 시민을 조준 사살했다. 무자비한 사냥의 결과 1030명이 부상하고, 225명이 사망했다. 그중 60명은 어린아이였다.
담배 경고문조차 세 가지 언어로 씌어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선다. 1층은 박물관으로 터널을 만들 때 사용한 각종 도구와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지하로 내려가자 허리를 한껏 구부려야 할 만큼 낮고 좁은 터널이 나타난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구간은 약 20m. 이 터널로 매일 30t 이상의 물품을 조달했고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다.
한 몸 가누기도 버거운 이 통로가 수백만 사라예보 시민의 생명줄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린다. 별관에는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당시 가장 인기가 좋았던 물자는 식량이 아니라 담배였다는 인터뷰 내용이다. 음식이야 먹어치우면 끝이지만 담배 한 개비는 배고픔을 잊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죽음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던 암흑의 시절, 담배 끝에 붙여진 빨간불은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을 것이다. 영상이 끝나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마르코가 갑자기 담뱃갑을 보여준다. 손바닥 반만 한 공간에 경고문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로 세 번이나 써져 있다. 말문을 잃은 내게 그는 한마디 던졌다. “담배경고문조차 세 가지 언어로 나눠 써야 하는 것. 이것이 사라예보입니다.”
안개가 자욱한 도시
요새에 도착하자 사라예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붉은 집들 사이로 첨탑과 십자가와 둥근 돔 지붕이 어지럽게 섞여 있고, 그 사이를 밀야츠카 강이 관통한다. 도시를 둘러싼 산 곳곳에는 공동묘지가 숲을 이뤘다. 하얀 것은 무슬림의 무덤이고, 검은 것은 기독교인들의 무덤이다. 철저하게 구획이 나뉘어 있지만, 대부분 묘비에 적힌 사망연도는 1992년에서 1995년 사이로 비슷하다. 전쟁이 끝난 지 약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다. 현재 보스니아는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가 차지한 스르프스카 공화국으로 아슬하게 나뉘어 있다. 사라예보는 언제나 안개가 가득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도시와 닮은 풍경이다. 석양이 진다. 비통한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내일은 안개가 걷히고 푸른 하늘이 찾아오길 간절하게 바라본다.
사라예보=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여행정보
사라예보로 가는 직항은 없다. 터키나 오스트리아, 체코 같은 국가를 경유해서 가야 한다. 발칸반도에서는 주요 도시를 잇는 버스나 미니밴을 이용할 수 있다. 화폐 단위는 보스니아 마르크(BAM)다. 1보스니아 마르크는 한화로 약 675원이다. 달러나 유로를 가져가 환전하거나 자동입출금기(ATM)에서 인출할 수 있다. 환전은 은행보다는 사설환전소가 조금 더 유리하다. 언어는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를 공용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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