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최저임금, 차라리 정부가 직접 결정하라
최저임금 결정이 법정시한을 넘기는 건 예삿일이 돼 버렸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대체 누가 최저임금을 결정하기에 매년 이 모양일까.

최저임금위원회는 애초 갈등 구조다. 노측은 언제나 30% 인상안을 들고 나오고 사측은 동결을 주장한다. 터무니없기는 오십보백보다. 협상이 이뤄질 턱이 없다. 억지만 오간다. 법정시한을 넘겨 공익위원들이 만든 중재안이라는 것이 표결에 부쳐지는데, 대개 노사 한쪽이 퇴장한 가운데 이뤄진다. 결국 최저임금 협상은 하투(夏鬪)의 전초전으로 변질돼 노사 간 악감정만 쌓이게 만드는 이상한 절차가 돼 버렸다.

객관적인 지표를 토대로 결정되는 적은 없다. 물론 위원회는 근로자 생계비, 유사 근로자의 임금, 노동생산성, 소득분배율 등 객관적 자료를 성실하게 구하고 분석한다. 그러나 전체회의가 열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숫자가 된다. 정치적인 발언에 정치적인 해결책만 제시될 뿐이다. 열심히 배운 미적분 공식은 제쳐 둔 채 주먹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꼴이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에 대해서는 상반된 연구 결과들이 존재한다. 최저임금을 가파르게 올리면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는 젊은 사람들이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최저임금 인상이 빈곤 탈출의 지름길이라는 반론이 맞부딪친다. 데이비드 카드, 앨런 크루거 두 학자가 주류학계에 반론을 던지면서 시작된 찬반 양론은 20여년째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시카고대가 전문가를 상대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을 줄일 것인가’라는 설문을 했는데 줄어든다, 아니다, 모르겠다가 3분의 1씩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헷갈리는 게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 결정에 정치 논리를 반드시 배제하고 적정선을 찾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경제와 고용 상황, 경쟁력은 물론 사업장의 지급능력까지 모두 감안해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데이터는 공신력과 객관성을 갖춰야 한다.

그래도 정치인들은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 안달한다. 올해도 야당 의원들은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급 1만원 수준으로 올리고 내년 적용 최저임금을 두 자릿수 이상 인상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일찌감치 채택했다. 그것도 모자라 전원회의 시간에 맞춰 최저임금위원회를 단체로 방문해 겁박까지 했다. 엊그제는 말도 안 되는 ‘최저임금결정법’이라는 걸 들고나왔다. 노동계의 주장 그대로다.

여당이라고 다를까. 논리나 원칙은 전혀 없다. 그저 야당보다는 적어야 할 것 같아서 1만원에서 1000원 빠진 9000원을 내세운 새누리다. 노동개혁은 어디 가고 표심만 좇는 모습이라니.

정치권의 자가발전이다. 국민들은 제발 정치권이 빠져 주길 바란다.

노·사·정이 참여하는 지금 방식은 유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30년 최저임금위원회의 수명이 다했다는 얘기다. 정부는 어디 가고 당사자들만 나와 주먹질을 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의 시스템이다.

노사는 의견만 제시하고 정부가 결정하는 시스템이 옳다. 기술 관료들이 다양한 변수를 철저하게 진단하고 분석해 최저임금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프랑스 사례가 타산지석이다. 일단 상설위원회가 없다. 정부가 노사 대표 의견을 단 한 차례 청취한 뒤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객관적인 지표와 공식에 의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니 노사 간 갈등이나 힘겨루기는 거의 없다.

최저임금 논의 자체도 격년 또는 3년마다 하는 게 좋다. 2000년 이후 연간 물가상승률이 2~3%다. 최저임금에 대한 변수가 바뀌지 않는데 매년 이게 무슨 소동인가.

업종별·지역별로도 차등화하자. 일괄 적용은 맞지 않다. 그리고 글로벌 기준으로 하자. 계산에 빠져 있는 상여금 숙박비 식비도 다 포함하자. 최저임금 제도를 유지하려면 모든 게 정상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정치적 논리나 조직근로자의 이해관계는 배제하고 저임금 근로자 보호라는 본래 취지에만 초점을 맞추자.

매사를 노·사·정이라는 허울뿐인 합의 틀에 맡겨 두고 뒤에 숨은 고용노동부 관리들이다.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김정호 수석논설위원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