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채동욱의 추억
불현듯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 사람을 저승으로 보냈던, 피의자들을 극한으로 몰아쳤던 압박 수사의 전범.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재벌들을 한 손아귀에 움켜쥐려고 했던…. 결국에는 소위 경제활성화(?)의 장애물로 지목되면서 지독한 저항 끝에 제거되었다던 그 이름 말이다. 먼저 CJ그룹의 이재현을 잡아넣고, 다음에는 롯데의 신동빈, 그 다음이 S그룹의 모 부회장, 또 그 다음은 D그룹의 오너들이 차례로 구속된다는 소위 ‘명단’이 나돌던 시절이었다. 채동욱의 퇴장과 함께 광풍도 막을 내렸다. 조용한 김진태 검찰총장 아래 2년여를 은인자중하던 검찰이 다시 피바람을 뿌리며 등장했다는 이야기.

주말 동안의 언론은 ‘수사관 240명이 17곳을 무차별 압수수색’하여, ‘1톤 트럭 17개 분량을 압수’하고, ‘오너 일가와 경영자 24~30명에 대해 무더기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는 뉴스를 쏟아냈다. 검찰은 수사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듯 언론사별로 범죄사실을 하나씩 흘려주는, 소위 피의사실 공표까지 감행하고 있다. 역외 탈세, 일감 몰아주기, 부동산 특혜 매입, 영화관 매점 특혜 등이 줄을 잇는다. 입점 대가로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납품 대가로 뇌물을 요구하는 등으로 롯데의 도덕성은 치명상을 입고 있다.

롯데는 고객수가 3300만명, 거래 기업이 수만개가 넘는 내수 기업이다. 롯데마트가 다루는 물건의 가짓수는 3만개다. 이 3만개 물건을 놓고 경쟁하는 수만의 업자들을 생각해보라. 롯데를 벌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고배를 마신 이 수만명 사업주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납품에서 배제되거나, 진열대에서 물건을 빼라는 요구에 직면한 업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롯데백화점은 입점 브랜드만도 1200개다. 면세점은 900여개. 물론 경쟁률을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브랜드가 입점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투서가 날아다니고 민원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사업장이다. 유통은 영업이익률이 박하기에 종업원 급여도 낮았다. 롯데의 경영 수준은 바로 한국 유통산업의 수준이다. 그나마 성공한 롯데가 그렇다.

검찰은 차제에 신동빈을 제거하고 롯데를 신동주에게 넘기기로 작정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신동빈을 괴멸시키는 이런 거친 방법을 택했을 리가 없지 않나. 검찰은 17곳 경영 지휘소를 전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꼬리를 무는 의문은 자연스럽다. 법원이 그런 살인면허적 영장을 발부해준 것인지도 궁금하다. 구체적 범죄와 장소와 인물이 아니라 ‘롯데그룹 전 계열사와 영업장’ 식의 영장이 발부될 수 있는 것인지, 차량 17대 분량의 서류와 컴퓨터와 직원 휴대폰까지 모조리 압수하는 것이 가능한지, 24~30명에 이르는 주요 임원을 출국 금지시키는 투망식 수사가 가능한지도 궁금하다. 하루하루의 매출에 나날의 삶을 거는 수만명 직원들이 땀흘려 일하는 직장을 이런 식으로 짓밟아도 되는 것인지. 수사에도 예의가 있고 절도가 있고 수사받는 자에 대한 최소한의 고려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조폭과 깡패를 소탕하듯이, 꼼짝마! 손들어! 식의 수사관행은 너무도 화려해서 다른 무언가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우리는 경제활성화에 바빠 검찰 일은 잘 모른다”는 것이 청와대의 말이다. 검찰이 롯데에 들이닥친 것은 정부가 어렵사리 조선 구조조정의 가닥을 타고, 한은이 금리를 사상 최저로 인하하는 특단의 경기대책을 내놓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경제에는 찬물 정도가 아니라 얼음물을 양동이로 쏟아부은 꼴이다. 경제를 죽이는 데 이렇게 손발이 척척 맞을 수도 없다. 물론…, 사법 정의는 실현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작은 정의조차 안갯속을 방황하는 순간이 많다. 호텔롯데의 상장이 올스톱되는 등 피해가 커지고 있다. 신중함은 검찰에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라는 것인지.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