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합작 '대백과' 펴낸 평화문제硏, 국토지리정보원·교수 상대 소송

국토교통부 산하기관이 펴낸 지리정보 서적이 북한 체제선전·사상검열 핵심기관인 선전선동부의 지리·인문·풍속 자료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은 북한 기관과 협약을 맺고 공동으로 자료를 펴낸 국내 연구단체가 제기했다.

단순한 북한 지도나 지리정보는 저작권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 판례가 있지만, 북한 정부 차원에서 국토의 역사와 문화, 지리와 동식물, 역사와 풍속 등을 집대성한 지역 정보 및 지리학 연구 성과의 저작권을 인정할지 다투는 것은 첫 사례로 알려져 주목된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남북문제 전문 연구기관인 평화문제연구소는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의 연구용역을 맡아 대표책임자로 활동한 국립대 김모 교수를 상대로 1억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1일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사건은 민사43단독 양환승 판사가 맡는다.

평화문제연구소는 자신들이 북한으로부터 저작권 행사를 양도받은 '조선향토대백과' 내용을 지리정보원 측이 무단 사용했다는 입장이다.

앞서 이 연구소는 2003년 2월 북한 선전선동부 소속 출판기관인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와 공동으로 20권짜리 대백과를 편찬했다.

계약은 남북협력사업을 관장하는 통일전선부 산하 광명성총회사와 맺었다.

북한 외 모든 지역에서 평화문제연구소가 저작권을 행사하도록 권한을 넘겨받았다.

조선향토대백과는 북한 전역의 지리와 역사, 문화 등 인문·자연 지리정보를 도·시·군, 동·읍·리별로 집대성한 책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당국의 승인을 받아 함께 펴낸 출판물로 알려졌다.

중국 민간기관인 요녕성 조선민족문화연구소도 '협력자' 자격으로 발간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지리학회가 2013년 10월 국토지리정보원의 연구용역을 수주해 김 교수가 대표책임자로서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을 펴내자 평화문제연구소는 이 책이 조선향토대백과를 허락 없이 인용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은 총 2권 1천700쪽 분량(각권 850쪽)으로 북한 각 지역 이름과 그 유래를 다룬다.

평화문제연구소는 이 책자 내용 중 969곳이 조선향토대백과를 무단 인용했다고 주장했다.

분단 이후 달라진 북한의 지명들은 물론 산이나 강의 높이, 길이, 면적 및 역사·문화 정보 등을 조선향토대백과에 의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당초 연구소는 2014년 7월 국토지리정보원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지만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에 연구소는 항고하는 한편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국토지리정보원과 김 교수는 지도나 지리정보가 창작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자료인 만큼 저작권 보호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지리정보는 사회에서 공유되는 속성이 있어 독점될 수 없고 창작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2011년 지도책을 무단으로 복제해 판매했다가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행지도 제작업체 Y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사례가 있다.

단순한 지도나 지리정보는 누가 제작해도 같거나 비슷할 수밖에 없고 창작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평화문제연구소를 대리하는 통인법률사무소의 한명섭 변호사는 "수십년째 분단된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북한 지리정보는 창작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변호사는 법무부 특수법령과 등에서 근무한 검사 출신으로, 개성공업지구·금강산 출입체류 합의서 성안과정에 참여했고 북한학을 연구한 남북관계 법률 전문가다.

다른 소송대리인 법률사무소 솔의 정진섭 변호사는 "북한과 공식적으로 협상해 편찬한 지리정보의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북 관계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jae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