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불안·자금유출 가능성에도 미국보다 먼저 움직여
'디플레 파이터' 역할 시사…이제 공은 정부로


부진한 경기 회복세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화끈하게 움직였다.

조선·해운 등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 10조원을 지원하기로 한데 이어 기준금리도 예상을 뒤엎고 전격 인하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을 비롯한 국제금융시장의 불안 가능성이 남아있긴 하지만 예상 인상시기가 미뤄진 기회를 활용해 미국보다 먼저 움직였다.

9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1.25%로 기존보다 0.25%포인트 내리기로 한 것은 금융시장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금통위에 앞서 지난 7일 한국금융투자협회가 공개한 설문 결과를 보면 채권시장 전문가 중 79.4%가 이달 금통위에서 기준금리가 동결될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엔 다음 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여부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열릴 예정이고 일본은행의 통화정책회의와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투표가 남아있는 등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요인이 산적해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면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고용지표가 부진해진 영향으로 미국이 조만간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줄어들자 이 총재는 이를 국내 기준금리 인하의 기회로 삼았다.

이 총재는 9일 "기준금리 인하를 언제 생각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지난 주말"이라고 답했다.

미국의 비농업부문 신규 일자리 수가 발표된 날이다.

여러 불안요인이 남아있긴 하지만 미 연준이 다음 주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면 어쨌든 금융시장의 충격이 발생할 가능성은 줄고 한은도 안정적인 기준금리 인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날 기준금리 인하가 '비둘기파'인 신임 금통위원들에게 이끌려 결정된 것이 아니라 금융통화위원 7명의 만장일치였다는 점은 이 총재와 장병화 부총재 등 기존 한은 집행부도 금리 인하 필요성에 공감해 함께 움직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총재는 그동안 부진한 국내경기의 회복세에도 계속 기준금리를 동결해 정부를 비롯한 대내외에서 인하 압박을 받아왔다.

정부가 추경과 조기 예산 집행 등을 통해 경기 살리기에 주력하는 동안 한은은 뭘하고 있느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 8일 발표된 기업 구조조정 방안에서 한은이 10조원에 달하는 국책은행 자본확충자금을 대기로 한 데 이어 기준금리까지 인하함으로써 한은도 올 하반기 경기 충격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한은 금통위는 이날 금통위 종료 후 발표한 '통화정책방향' 의결문에서 "앞으로 성장세 회복이 이어지고 중기적 시계에서 물가상승률이 목표수준에 접근하도록 통화정책을 운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부진한 물가를 끌어올리는 '디플레 파이터'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통화정책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는 문구를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공은 다시 정부로 넘어간 모양새다.

이날 한은이 경기의 하락 위험이 커졌다고 밝히고 다음 달 성장률 전망을 또다시 낮출 가능성을 시사함에 따라 정부의 구조조정 대응과 추경 등 경기대응 정책이 주목받게 됐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현재의 경기 부진은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측면이 커서 통화정책만으로 대응할 수는 없으며 정부의 재정과 구조개혁이 함께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훈 기자 hoon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