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화가들 '감성 블랙박스' 드로잉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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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현대, 7월10일까지 '애프터 드로잉'전 열어
김환기·김창열·정상화·박서보 등 8명 작품 60여점
김환기·김창열·정상화·박서보 등 8명 작품 60여점
“드로잉은 작가의 깊은 내면세계, 원시성과 맞닿아 있다. 유화는 분식(粉飾)과 덧칠을 통해 다시 그릴 수도 있지만 드로잉은 눈속임이나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파블로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 피카소의 대리인이던 스위스 화상 얀 크루기어(88)의 말이다. 드로잉은 이처럼 거칠고 솔직한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 있기에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근 드로잉이 습작이나 본격적인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라기보다 독립된 회화로 평가되면서 국제 미술시장에서 가격이 오르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 거장 라파엘로의 습작 ‘사도 두상’은 2012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2970만파운드(약 516억원)에 팔려 드로잉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한국미술 반세기의 발자취를 드로잉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애프터 드로잉(After drawing)’전이 오는 7월10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펼쳐진다. 국내 드로잉 작품 전시 중 최대 규모(가격 기준)다. 작고한 김환기와 이승조 화백을 비롯해 정상화 김창열 이우환 윤명로 김기린 등 작품성이 뛰어난 추상화가 여덟 명의 작품 60여점을 걸었다. 연필이나 펜, 붓, 목탄으로 그린 전형적인 종이 그림이 주축을 이루지만 드로잉를 바탕으로 작업한 유화도 배치했다. 드로잉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작가의 실험적인 태도나 완성된 화풍을 형성하기 전 고민이 담긴 작품을 감상할 기회다.
김환기는 생전에 “드로잉의 재미에 빠지지 않고는 참다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작업시간이 짧은 드로잉을 틈틈이 그려 다양한 조형을 실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1959~1960년 연필로 산과 달, 달항아리 등을 즉흥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그린 드로잉북(39점)과 이를 바탕으로 작업한 유화를 만날 수 있다.
‘묘법의 작가’ 박서보 화백은 평판 크레용, 연필, 수정펜을 활용해 커다란 방안지(모눈종이)에 정교하게 수정하며 옮겨 그리는 드로잉 작업으로 유명하다. 드로잉을 ‘감성 블랙박스’라고 부르던 그는 회화의 치밀성과 정교성, 완결성 등을 보여주자는 생각에 2001년 화집 ‘에스키스 드로잉’(작업을 하기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1990년대 제작한 에스키스 드로잉과 2000년대 작업한 유화 색면 ‘묘법’ 등을 나란히 걸었다.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화백의 드로잉도 여러 점 나와있다. 종이에 연필로 수천 번 선을 그은 뒤 일부를 칼로 떼내는 방식으로 작업한 게 이색적이다.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대신에 자신만의 비법으로 바탕의 질감을 형성해낸 정 화백의 원초적인 조형론을 살펴볼 수 있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이 1970년대 물방울 연작의 시발로 그린 드로잉도 관람객에게 처음 공개된다. 프랑스 파리 아틀리에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 물방울에 대한 생각을 스케치한 작품들이다. 개막에 맞춰 26일 전시장을 찾은 김 화백은 “물방울을 그리기 전의 구상을 담은 메모장처럼 보이지만 솔직한 감성을 담았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1980년대 목탄으로 작업한 이우환, 종이에 ‘파이프’처럼 수놓은 이승조, 추상화에 동양적 미학을 담은 윤명로, 물질문명에 찌든 현대인의 감성을 녹여낸 윤형근, 붓으로 내면의 울림을 빠르게 잡아낸 김기린의 드로잉 작품들도 유화와 나란히 걸렸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도형태 갤러리 현대 사장은 “유화가 한껏 화장하고 차려입은 여성이라면 드로잉은 목욕탕에서 갓 나온 화장기 없는 얼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비유할 수 있다”며 “드로잉은 작품이 탄생되기까지의 시간과 공간, 감정, 사색, 행동의 ‘타임캡슐’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파블로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 피카소의 대리인이던 스위스 화상 얀 크루기어(88)의 말이다. 드로잉은 이처럼 거칠고 솔직한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 있기에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근 드로잉이 습작이나 본격적인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라기보다 독립된 회화로 평가되면서 국제 미술시장에서 가격이 오르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 거장 라파엘로의 습작 ‘사도 두상’은 2012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2970만파운드(약 516억원)에 팔려 드로잉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한국미술 반세기의 발자취를 드로잉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애프터 드로잉(After drawing)’전이 오는 7월10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펼쳐진다. 국내 드로잉 작품 전시 중 최대 규모(가격 기준)다. 작고한 김환기와 이승조 화백을 비롯해 정상화 김창열 이우환 윤명로 김기린 등 작품성이 뛰어난 추상화가 여덟 명의 작품 60여점을 걸었다. 연필이나 펜, 붓, 목탄으로 그린 전형적인 종이 그림이 주축을 이루지만 드로잉를 바탕으로 작업한 유화도 배치했다. 드로잉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작가의 실험적인 태도나 완성된 화풍을 형성하기 전 고민이 담긴 작품을 감상할 기회다.
김환기는 생전에 “드로잉의 재미에 빠지지 않고는 참다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상대적으로 작업시간이 짧은 드로잉을 틈틈이 그려 다양한 조형을 실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1959~1960년 연필로 산과 달, 달항아리 등을 즉흥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그린 드로잉북(39점)과 이를 바탕으로 작업한 유화를 만날 수 있다.
‘묘법의 작가’ 박서보 화백은 평판 크레용, 연필, 수정펜을 활용해 커다란 방안지(모눈종이)에 정교하게 수정하며 옮겨 그리는 드로잉 작업으로 유명하다. 드로잉을 ‘감성 블랙박스’라고 부르던 그는 회화의 치밀성과 정교성, 완결성 등을 보여주자는 생각에 2001년 화집 ‘에스키스 드로잉’(작업을 하기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1990년대 제작한 에스키스 드로잉과 2000년대 작업한 유화 색면 ‘묘법’ 등을 나란히 걸었다.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 화백의 드로잉도 여러 점 나와있다. 종이에 연필로 수천 번 선을 그은 뒤 일부를 칼로 떼내는 방식으로 작업한 게 이색적이다.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대신에 자신만의 비법으로 바탕의 질감을 형성해낸 정 화백의 원초적인 조형론을 살펴볼 수 있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이 1970년대 물방울 연작의 시발로 그린 드로잉도 관람객에게 처음 공개된다. 프랑스 파리 아틀리에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 물방울에 대한 생각을 스케치한 작품들이다. 개막에 맞춰 26일 전시장을 찾은 김 화백은 “물방울을 그리기 전의 구상을 담은 메모장처럼 보이지만 솔직한 감성을 담았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1980년대 목탄으로 작업한 이우환, 종이에 ‘파이프’처럼 수놓은 이승조, 추상화에 동양적 미학을 담은 윤명로, 물질문명에 찌든 현대인의 감성을 녹여낸 윤형근, 붓으로 내면의 울림을 빠르게 잡아낸 김기린의 드로잉 작품들도 유화와 나란히 걸렸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도형태 갤러리 현대 사장은 “유화가 한껏 화장하고 차려입은 여성이라면 드로잉은 목욕탕에서 갓 나온 화장기 없는 얼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에 비유할 수 있다”며 “드로잉은 작품이 탄생되기까지의 시간과 공간, 감정, 사색, 행동의 ‘타임캡슐’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