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한국형 양적완화는 '눈속임 조세'
한국은행이 결국 이른바 ‘한국형 양적 완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한국형 양적 완화는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려는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양적 완화와는 달리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 자금을 지원하게 하는 것이다.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재정의 역할이지 한은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는 태도를 취하다가 여론의 압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태세다.

구조조정에서 한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는 사람들은 사안의 시급성을 든다. 그리고 미국 중앙은행(Fed)이 2008년 금융위기 때 GE, GM 등에 직접 구제금융을 투입한 사례와 과거 한은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4년 카드사태 때 정부의 구조조정을 돕기 위해 부실채권정리기금 채권과 예보채를 사들인 적이 있다는 사례를 든다. 게다가 한은의 발권력을 이용하든, 증세와 채권을 발행하든 어차피 국민이 부담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재정이 어려우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이지 무슨 큰 문제냐는 식이다.

물론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도, 재정을 쓰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국민의 부담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재정을 통해 구조조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세금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세금을 올리면 우선 조세 저항에 부닥친다. 그리고 세금 회피 등이 증가하게 돼 원하는 양만큼 조세 수입을 확보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또 증세를 하려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채권 발행은 결국 미래의 세금이기 때문에 증세와 같은 문제가 존재한다. 이렇게 재정을 통한 방법에는 제약과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정부의 지출을 억제할 수 있는 내부장치가 있다.

발권력을 이용하는 것은 이와는 다르다. 돈을 찍어내면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올라 결국 국민에게 세금을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의 문제점은 일반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이 탈취된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저항 없이 정부는 원하는 양만큼 자금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발권력을 이용하는 것은 정부 지출을 억제할 수 있는 내부장치가 없어 정부가 가장 쉽게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발권력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눈속임 조세’이므로 매우 비도덕적이다. 이런 점에서 발권력을 이용하는 것은 증세나 채권 발행을 통한 차입보다 훨씬 나쁜 방법이다.

이번 한국형 양적 완화가 야기하는 더 큰 문제는 정부가 필요할 때 한은의 발권력을 이용하는 또 하나의 선례를 남긴다는 데 있다. 선례가 자꾸 쌓이면 나중에는 그것이 당연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 정부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쉬운’ 방법인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할까봐 두렵다.

그리고 미국 Fed가 GE, GM 등에 직접 구제금융을 투입했다고 해서 구조조정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적어도 미국은 무분별한 통화 발행을 경계하는 인식이 있다. 최근 통화정책을 테일러 룰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는 법이 미 하원에서 통과돼 현재 상원에 계류 중인데, 이것이 그런 사실을 보여준다.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절박함에 직면하게 된 데에는 정부의 잘못이 크다. 기업의 구조조정 문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계속 제기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구조조정을 계속 미루는 사이 기업들의 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데 대해 시급성만 내세우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 적어도 그에 대한 죄책감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는 다시는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경직적인 노동시장을 개혁하고 규제로 점철된 관치경제를 청산해야만 가능하다. 이래저래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구조개혁이다.

안재욱 < 경희대 교수·경제학 jwan@kh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