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스크린 생산업체인 디지텍시스템스에 700억원대의 은행 자금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불법 로비가 이뤄진 정황을 검찰이 적발했다. 2014년 금융권을 강타한 ‘모뉴엘 사기대출 사건’과 마찬가지로 수출입은행 등 국책금융회사까지 연루돼 파장이 클 것이란 전망이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검 금융조사2부(부장검사 박길배)는 디지텍시스템스에 700억원대 은행 대출을 알선해주고 10억여원을 챙긴 혐의(알선수재 등)로 최모씨(51) 등 브로커 세 명을 최근 구속했다. 검찰은 국책은행 임직원의 금품 수수 등 불법 행위 혐의에 대해서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단독] 수백억 대출 사기 또 당한 수출입은행
디지텍시스템스는 2012년 스마트폰용 터치스크린패널 생산 국내 1위를 기록한 중견기업이다. 하지만 같은해 기업사냥꾼에 의해 무자본 인수 된 뒤 횡령과 주가조작 사건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됐다. 이듬해 수출입은행과 국민은행, 농협은행 등은 650억원을 이 업체에 대출했다. 무역보험공사도 이 무렵 50억원을 지급보증했다.

2014년 초 디지텍시스템스 경영진의 횡령 혐의를 수사한 서울중앙지검에 따르면 최모씨 등 기업사냥꾼들은 사채업자 등을 동원해 2012년 2월 디지텍시스템스 경영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회사 재무를 담당했던 남모 이사(41)와 공모해 500억원의 회삿돈을 페이퍼컴퍼니로 빼돌렸다. 최씨는 이 돈으로 기업 인수에 동원된 사채를 갚았다.

서울남부지검은 남 이사 등이 횡령으로 악화된 회사의 현금흐름을 어떻게 메웠는지에 주목했다. 남 이사는 2012년 말 한 투자자문사 대표인 최모씨(51) 등 브로커들을 찾았다. 브로커 최씨는 남 이사로부터 4억5000여만원을 받고 수출입은행으로부터 300억원, 국민은행으로부터 280억원의 대출을 알선해줬다. 다른 브로커 곽모씨(41)는 무역보험공사의 50억원어치 지급보증서 발급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3억여원을 받았다. 이모씨(43)도 농협은행의 50억원 대출을 알선해주고 남 이사로부터 2억7000만원을 챙겼다.

검찰 조사에서 브로커들은 “디지텍시스템스가 금품로비를 통해 은행 대출과 보증서 발급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말 불거진 모뉴엘 사기대출 사건에서도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의 부장급 간부들이 모뉴엘로부터 수천만원대의 금품을 받고 대출과 보증 등 편의를 제공했다가 적발됐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규정에 따라 대출을 했지만 회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대출이 부실화돼 지난해 손실로 반영했다”며 “대출 심사의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디지텍시스템스를 둘러싼 대출사기 의혹은 수년 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2014년 금융감독원 검사에서는 씨티은행이 위조된 삼성전자 매출채권을 받고 1700만달러(약 180억원)를 대출해준 사실이 밝혀졌다. 씨티은행 임원 4명은 지난해 1월 금감원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디지텍시스템스는 은행 대출에도 2013년부터 재무상황이 급격히 악화돼 2014년 2월 법정관리 신청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코스닥시장에서 상장폐지됐다. 검찰은 브로커들이 받은 자금이 은행 대출 담당자들에게 흘러들어갔을 개연성이 큰 것으로 보고 조만간 은행 관계자들을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다.

오형주/김일규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