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성 전 한전 이사장 "어려운 젊은이들 돕는 일…아내도 좋아할 것"
지난 18일 오후 서울 중구 한 식당에 백발의 노신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악수하기 위해 내민 손은 굵고 주름져 있었지만 따뜻했다. “아내가 기부한 것이나 마찬가진데 왜 나를 인터뷰하느냐”고 첫마디를 던진 이 신사는 한국 발전업계의 산증인인 문희성 전 한국전력 이사장(81·사진)이다.

문 전 이사장은 지난달 25일 1억5000만원을 출연해 작년 10월 사별한 부인 박종식 전 덕성여대 교수의 이름을 딴 ‘박종식 장학금’을 서울대에 설립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 1명에게 매년 600만원 상당의 전액장학금을 주기로 했다. 1억원은 고인의 유산에서, 5000만원은 문씨가 마련했다. 부부는 이전에도 도서관 건립 등에 틈틈이 기부해왔다.

문 전 이사장은 “생전에 다른 사람 돕는 일을 좋아한 아내는 학창 시절 은사인 장명욱 전 서울대 교수의 이름을 딴 장학금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며 “간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크지 않은 돈이지만 아내 이름이 붙은 장학금을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 전 이사장과 박 전 교수는 1960년 미국 미네소타대의 한국인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1957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한전에 입사한 문 전 이사장은 국내 원자력 도입을 위한 ‘원자력 장학생’으로, 1958년 서울대 가정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영양사로 일했던 박 전 교수는 미국의 교육원조 프로그램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미네소타대에서 공부했다. 박씨를 보고 첫눈에 반한 문씨의 열렬한 구애 속에 그들은 2년 뒤 화촉을 밝혔다.

귀국 후 문 전 이사장은 1966년 한전 초대 원자력 과장을 맡아 국내 최초 원자로인 고리1호기 도입에 큰 역할을 하는 등 원자력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1970년대 말 2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널뛰기하자 한전에서 액화천연가스(LNG) 도입을 주도하는 등 한국가스공사 설립에 산파 역할을 했다. 한전 부사장을 마치고 1985년부터 1991년까지 6년간 제2대 한국가스공사 사장을 지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전 이사장을 맡았다. “군부 출신 ‘낙하산’ 인사가 공기업 등 요직을 독점하던 시절 엔지니어로서 전문성 하나로 가스공사에서 역대 최장수 사장을 지냈다”고 문 전 이사장은 설명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일에 치여 주변을 둘러볼 생각을 잘 못 했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도 어렵고 먹고살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하는데 비록 큰돈은 아니지만 어렵게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임파선암으로 투병 중이다. 지난 몇 달간 약물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졌다는 문 전 이사장은 “오래 살아야 다른 사람도 도울 텐데”라며 “다음에 볼 때는 더 건강해져서 만나자”고 인사했다.

황정환/오형주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