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일자리를 지배하는 두 가지 법칙
일자리는 두 가지 법칙에 지배된다. 제1법칙은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는 것이다. 제2법칙은 일자리 총량은 총분업 수의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 두 법칙으로부터 다양한 명제들이 파생된다. 일자리를 국정목표로 내세우는 것은 정치 선전에 불과할 뿐 실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은 제1법칙에서 파생된다.

일자리는 오직 기업 활동의 총량이 결정한다. 따라서 노동의 수요와 공급도 시장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일자리를 늘리려면 기업 투자를 늘려야 한다.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유사 정치적이며 독점조직인 노동조합은 일자리에 적대적이다. 노조는 해고를 어렵게 만들고 고임금을 추구한다. 말하자면 노조는 일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직이다. 정부가 ‘노·사·정 체제’로 노동시장을 개혁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은 ‘일자리=기업’ 원칙을 망각한 허망한 시도였다.

일자리가 분업의 수에 의해 제약된다는 제2법칙으로부터는 분업이 복잡해질수록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파생적 원칙이 유도된다. 이 원칙은 요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도 있다. 로봇이 일상화되면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게 된다는 걱정들은 이 두 번째 원칙을 오해한 결과다. 로봇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산업이 발달할수록 실업률이 낮아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되돌아보기 바란다. 이는 국가 간 비교에서나 한 국가의 시계열 비교에서나 다를 것이 없다. 무인차가 일상화되면 택시기사도 대리운전기사도 일자리를 잃게 된다. 자동차 보험 판매원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무인차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낼 것이고 차량 생산 과정에서는 고도화된 분업을 필요로 한다. 바로 그 복잡성만큼 일자리는 늘어난다. 또 그 복잡성만큼 임금도 올라간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로봇)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던 적은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말하는 그대로다. 노예가 넘쳐나면 사람들은 검투사를 만들어서라도 여유를 즐긴다. 이 법칙은 생산성이 높은 일자리야말로 진짜 일자리라는 점을 말해 준다.

박근혜 정부가 단 1인치도 노동시장을 개혁하지 못한 것은 이런 오해 때문이다. 소위 4대 개혁은 패배주의적이었고 과녁부터가 잘못 겨냥된 것이었다. 근로기준법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의 그 어느 조항도 개혁되지 않았다. 아니 시도조차 없었다. 언젠가는 근로계약법으로 전환돼야 할 근로기준법은 총칙에서부터 정부가 노사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관계법에는 노동시장이라는 개념부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근로기준법 제9조는 취업 알선과 직업 소개를 중간 착취로 규정하는 어처구니없는 규정을 두고 있다. 다만 파견법 직업안정법 등에서 규정한 ‘허용되는 중간 착취’가 있을 뿐이다. 파견을 중간 착취로 규정하는 법률 체계에서 파견 확대에 찬성하는 것은 착취에 찬성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소위 친노동세력들이 파견법에 반대하는 것은 이런 망상 때문이다. 일자리 소개업이 착취라니!

세계 최저인 노동조합 조직률과 세계 최강인 노조 전투력의 부조화는 한국 노동시장을 왜곡시키는 구조학의 본질이다. 파업 중 회사에 손실을 끼쳐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고(법 제3조) 노동조합원들의 90%가 산별노조를 탈퇴하려 해도 허가되지 않았던(최근에야 대법원이 허용하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그런 노조기득권 법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터럭만큼도 바뀌지 않았다. 강력한, 그리고 조직된 정규직 근로자들이 비조직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착취하는 부조리에 우리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정의에 반하는 낡은 체제는 이번에도 보장됐다. 이들 원칙은 임금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흥미를 끄는 것은 박근혜 정부가 산재보험법 등 3개 노동복지법에조차 노동개혁이라는 딱지를 붙여 놓는 바람에 이들마저 도매금으로 무산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노동복지법들은 말장난과 농담과 노래와 비아냥과 눈물쇼로 국회와 민주주의를 조롱했던 필리버스터 소동 속에서 조용히 잊혀졌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필리버스터였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