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선진국 '고액권 폐지' 논란…5만원권 없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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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100달러 폐지론 주목
부패방지와 통화정책 효과 보완
5만원권 없애면 화폐생활 혼란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부패방지와 통화정책 효과 보완
5만원권 없애면 화폐생활 혼란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선진국을 중심으로 고액권 폐지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500유로 지폐를,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100달러 액면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각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과 미국의 최고액권종이다. 앞서 캐나다 싱가포르도 최고액권 화폐 발행을 중단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각국 국민의 화폐 생활에서 법화(法貨·legal tender) 대신 대안화폐 비중이 커짐에 따라 고액권일수록 화폐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패와 뇌물, 탈루 수단 등으로 악용되고 있다. 심지어 이슬람국가(IS)나 북한 등의 테러나 조직범죄 재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부패는 시장경제 원리가 활성화되지 못한 국가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최근에는 선진국, 개발도상국 가릴 것 없이 부패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각국의 부패 방지 노력도 효과가 크지 않다. 독일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각국의 ‘부패지수(CPI)’를 보면 부패는 전 세계적으로 더 심해지는 듯한 분위기다.
각국의 ‘부패지수’와 성장률 간 관계를 보면 부패가 성장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장경제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초기 단계에선 관료에게 소위 ‘급행료’를 치르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이하인 저소득 개발도상국이 해당한다.
하지만 경제발전 단계가 높아질수록 부패는 시장기능을 마비시키고 외부불경제를 초래하면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 접어들 때 부패를 청산하지 못하면 성장이 둔화된다. 3만달러 이상 선진국에서는 부패로 성장이 정체하고 주가까지 급락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교수는 부패 등 지하경제 생성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각종 규제와 인가, 공무원의 자유재량권 등을 꼽았다. 이와 함께 △관료의 질 △공공부문의 임금 수준 △정당의 자금조달 등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부패 척결을 위해서는 고액권 폐지가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드라기 총재가 고액권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마이너스 금리 예치제도 효과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제도는 은행이 자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출을 도모하라는 취지에서 추진됐다. 경험국의 사례를 보면 이 제도는 궁극적으로 민간예금의 마이너스 금리로 귀착된다.
예금할 때 이자를 받는 대신 수수료를 내야 한다면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넣지 않고 소비에 사용해 경기가 살아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정반대 상황이 발생한다. 오히려 마이너스 금리 도입 이전에 예치했던 예금까지 인출해 시장에서 퇴장시킨다. 이때 고액권이 선호되면서 금융과 실물 간 연계성이 떨어져 경기가 더 침체한다.
고액권 회수율을 보면 이 같은 현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에서 100달러권 회수율은 2013년 82%에 달했지만 2014년에는 75.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500유로권 역시 102.1%에서 88.7%로 급락했다. 한국의 5만원권은 더 심하다. 작년 5만원권의 회수율은 40.1%에 그쳐 미국과 유로존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마이너스 금리 제도는 정책 무력화 명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미 통화정책의 무용론이 제기된 지는 오래됐다. 경제 주체가 미래를 불확실하게 생각함에 따라 금리 인하와 총수요 간 민감도가 떨어지면서 통화정책 전달경로(통화공급 확대→금리 인하→총수요 증가→경기 회복)가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이 제로금리 정책을 일제히 추진함에 따라 이제는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더 내릴 수 없다. 한 나라의 적정 금리를 따지는 피셔 공식이나 테일러 준칙, 수정된 테일러 준칙 등 어떤 기준으로 금리 수준을 평가해도 대부분 국가의 금리는 적정 수준에 비해 크게 낮다.
마이너스 금리 제도는 화폐 환상인 ‘민간의 부채경감 신드롬’을 이용하기 위해 적정 수준보다 낮은 금리를 더 떨어뜨려 경기를 부양하는 극약처방이다. 하지만 가계부채 부실 등 경제 주체의 현금 흐름에 문제가 있으면 경기 부양은커녕 또 다른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미래 불확실성을 줄여 통화정책 전달 경로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처방이다.
한국은 부패가 심하고 금리 효과도 종전만 못하다. 이 때문에 선진국의 고액권 폐지론에 편승해 5만원권 폐지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5만원권은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고액은 아니다. 다른 국가의 고액권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부패를 낳고 통화정책 효과를 떨어뜨리는 근본 원인부터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다. 섣부른 5만원권 폐지론은 국민의 화폐 생활에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이유는 분명하다. 각국 국민의 화폐 생활에서 법화(法貨·legal tender) 대신 대안화폐 비중이 커짐에 따라 고액권일수록 화폐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패와 뇌물, 탈루 수단 등으로 악용되고 있다. 심지어 이슬람국가(IS)나 북한 등의 테러나 조직범죄 재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부패는 시장경제 원리가 활성화되지 못한 국가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최근에는 선진국, 개발도상국 가릴 것 없이 부패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각국의 부패 방지 노력도 효과가 크지 않다. 독일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각국의 ‘부패지수(CPI)’를 보면 부패는 전 세계적으로 더 심해지는 듯한 분위기다.
각국의 ‘부패지수’와 성장률 간 관계를 보면 부패가 성장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장경제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초기 단계에선 관료에게 소위 ‘급행료’를 치르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이하인 저소득 개발도상국이 해당한다.
하지만 경제발전 단계가 높아질수록 부패는 시장기능을 마비시키고 외부불경제를 초래하면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 접어들 때 부패를 청산하지 못하면 성장이 둔화된다. 3만달러 이상 선진국에서는 부패로 성장이 정체하고 주가까지 급락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교수는 부패 등 지하경제 생성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각종 규제와 인가, 공무원의 자유재량권 등을 꼽았다. 이와 함께 △관료의 질 △공공부문의 임금 수준 △정당의 자금조달 등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부패 척결을 위해서는 고액권 폐지가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드라기 총재가 고액권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마이너스 금리 예치제도 효과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제도는 은행이 자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출을 도모하라는 취지에서 추진됐다. 경험국의 사례를 보면 이 제도는 궁극적으로 민간예금의 마이너스 금리로 귀착된다.
예금할 때 이자를 받는 대신 수수료를 내야 한다면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넣지 않고 소비에 사용해 경기가 살아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정반대 상황이 발생한다. 오히려 마이너스 금리 도입 이전에 예치했던 예금까지 인출해 시장에서 퇴장시킨다. 이때 고액권이 선호되면서 금융과 실물 간 연계성이 떨어져 경기가 더 침체한다.
고액권 회수율을 보면 이 같은 현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에서 100달러권 회수율은 2013년 82%에 달했지만 2014년에는 75.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500유로권 역시 102.1%에서 88.7%로 급락했다. 한국의 5만원권은 더 심하다. 작년 5만원권의 회수율은 40.1%에 그쳐 미국과 유로존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마이너스 금리 제도는 정책 무력화 명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미 통화정책의 무용론이 제기된 지는 오래됐다. 경제 주체가 미래를 불확실하게 생각함에 따라 금리 인하와 총수요 간 민감도가 떨어지면서 통화정책 전달경로(통화공급 확대→금리 인하→총수요 증가→경기 회복)가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이 제로금리 정책을 일제히 추진함에 따라 이제는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더 내릴 수 없다. 한 나라의 적정 금리를 따지는 피셔 공식이나 테일러 준칙, 수정된 테일러 준칙 등 어떤 기준으로 금리 수준을 평가해도 대부분 국가의 금리는 적정 수준에 비해 크게 낮다.
마이너스 금리 제도는 화폐 환상인 ‘민간의 부채경감 신드롬’을 이용하기 위해 적정 수준보다 낮은 금리를 더 떨어뜨려 경기를 부양하는 극약처방이다. 하지만 가계부채 부실 등 경제 주체의 현금 흐름에 문제가 있으면 경기 부양은커녕 또 다른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미래 불확실성을 줄여 통화정책 전달 경로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처방이다.
한국은 부패가 심하고 금리 효과도 종전만 못하다. 이 때문에 선진국의 고액권 폐지론에 편승해 5만원권 폐지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5만원권은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고액은 아니다. 다른 국가의 고액권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부패를 낳고 통화정책 효과를 떨어뜨리는 근본 원인부터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다. 섣부른 5만원권 폐지론은 국민의 화폐 생활에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