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뒷담화’라는 단어는 한 대형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 ‘담화(談話)와 우리 말의 뒤(後)가 합쳐져 생긴 말. 남을 헐뜯거나, 듣기 좋게 꾸며 말한 뒤 뒤에서 하는 대화’라고 나와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록돼 있지 않은 단어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던 뒷담화를 요즘엔 TV,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 사내 인터넷 게시판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불특정 다수가 공유하고 있다. 지난해엔 회사 내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익명으로 공유하는 앱 ‘블라인드’를 통해 대한항공, 두산인프라코어 등 개별기업의 내부 사정이 밖으로 흘러나와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상당수 기업인은 “경영에만 집중해도 살아남기 쉽지 않은 시절에 정확하지 않은 회사 내부 이야기가 공유돼 발생하는 에너지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익명에 숨은 마녀사냥이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젊은 직장인 사이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대나무 숲’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金과장 & 李대리] 기업 익명게시판·SNS 명암
음주문화 바꾼 사내 게시판

김모 대리(33)가 다니고 있는 한 정유회사 회식 자리에서는 올 들어 ‘술잔 돌리기’ 문화가 사라졌다. 술잔 돌리기는 자신이 비운 술잔을 동료에게 넘기면, 동료가 이 잔으로 술을 마신 뒤 되돌려주는 음주문화다.

이런 음주문화에 대해 이 정유회사의 젊은 직원들은 지난해 말 사내 익명게시판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연말 회식자리가 한창 이어지던 시기에 이 회사 익명게시판엔 “술잔 돌리기를 없애자”는 취지의 글이 올라왔다.

“위생상 문제가 있고, 구시대적인 문화”라는 게 해당 글의 요지였다. 일부 젊은 직원들은 실명으로 댓글을 다는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이 소식을 접한 최고 경영진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란 반응을 보였다. 이후 이 회사는 ‘술잔 돌리기를 자제하자’는 내용의 미니 캠페인을 벌였다. 김 대리는 “이 일이 있은 후 사내 회식에서 술잔 돌리기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정보 획득의 장 되기도

익명 앱인 블라인드를 다른 회사의 정보를 취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한 대형 회계법인에 근무하는 김모 회계사(35)는 블라인드에 개설된 다른 회계법인 게시판에 해당 회계법인 직원 명의로 몰래 가입했다.

다른 회계법인의 사내 정보를 보고 이직할 회사를 찾기 위해서다. 김 회계사는 블라인드를 통해 다른 회계법인의 사내 분위기, 임원들의 성향 등을 파악하고 있다. 김 회계사는 “다른 대형 회계법인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는데, 블라인드를 통해 알아보니 그 법인이 내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 식품회사 영업팀은 조직 차원에서 블라인드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다른 회사의 정보를 캐어 내 영업현장에서 활용하려는 목적이다. 이 회사에 근무하는 이모 과장(38)은 “다른 회사와 비슷한 시기에 출시한 신제품 영업을 하는 과정에서 블라인드를 통해 획득한 정보를 안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기도 한다”며 “예를 들어 경쟁사 오너와 관련된 안 좋은 소문들을 소문이 빠른 영업현장에 흘리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상사 험담 올렸다가…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정모 과장(33)은 얼마 전 자신의 실수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 과장은 매일 자신을 괴롭히는 부장의 험담을 최근 사내 익명게시판에 게재했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이 글을 복사해 부장을 제외한 팀원들만 모여 있는 단체 모바일 대화방에도 올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글을 작성한 것처럼 “이거 보세요. 우리 부장 욕하는 이야기가 게시판에도 올라왔네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런데 게시판 글을 복사해 단체 모바일 대화방에 올리는 과정에서 익명게시판에 글을 올린 사람이 정 과장이란 사실이 들통나버렸다. 실수로 익명게시판 글 작성자(정 과장)에게만 드러나는 각종 메시지까지 모두 긁어 모바일 대화방에 올려버린 것.

정 과장과 친한 한 동료는 “정 과장, 아까 익명게시판에 글 올린 사람이 너란 거 티가 확 나”라고 연락해왔다. 그는 “곧바로 모바일 대화방에 들어와 있는 팀원들에게 이실직고하고 ‘주변에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지금도 부장이 이 사실을 알까 봐 두렵다”고 하소연했다.

익명 게시판 대신 익명 이메일

기업의 홍보실 직원에게 익명게시판과 익명 앱은 반갑지 않은 존재다. 한 대기업 홍보팀 윤모 주임(30)에겐 최근 주요 언론사 기사확인 이외에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을 확인하는 업무가 추가됐다. 그는 블라인드에 수시로 접속해 혹시나 회사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올라오지는 않는지 확인한다.

윤 주임이 재직 중인 회사 게시판에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갖고 일부 임원을 비판하는 글들이 가끔 게재되고 있다. 윤 주임은 “공감되는 글들도 올라오지만, 회사에 의도적으로 흠집을 내려는 직원도 적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익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직원들과 소통에 나서는 조직도 있다. 이모 과장(36)이 근무 중인 공공기관이 이런 예에 해당한다. 이 공공기관은 최근 ‘익명 메일’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회사 메일에 메일을 보낸 사람의 실명을 받는 사람이 확인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익명게시판이 자칫 특정인을 목표로 한 ‘마녀사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회사 측의 조치였다.

이 과장은 이 메일을 활용해 평소 갖고 있던 인사평가 제도에 대한 불만을 기관장에게 털어놨다. “인사팀 임직원들과 접촉이 많은 부서만 인사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용기를 내 이 이메일을 발송한 뒤 이 과장은 후회만 커졌다. 괜히 추적당해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생겼다. 하지만 회사에는 어느 날 이 과장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목적의 인사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가 꾸려졌다. 기관장은 사내게시판에 “성과평가서를 내가 직접 꼼꼼하게 읽겠다”는 글도 올렸다.

김태호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