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대기업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현대자동차 LG 롯데 두산 등 주요 그룹의 연말 정기인사에서 상당수 임원이 퇴직했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맞물려 올해 말까지 대기업 임원 2000명 이상이 쏟아져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헤드헌터들에게는 평소 연락조차 하기 힘들었던 대기업 임원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하지만 헤드헌터들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많은 공급을 수용할 정도로 수요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 인력의 최대 수요자는 중견기업이다. 그동안 대기업에서 나온 인력들은 동종 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구조였다. 이들 중견기업의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이영미 커리어케어 전무는 “중견기업 상황이 좋지 못하다 보니 추천해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전 직장에서 받던 처우를 그대로 이어가려는 일부 대기업 출신 임원들의 성향도 중견기업들에 부담을 주고 있다. 헤드헌팅업계에 따르면 ‘패키지’를 요구하는 대기업 출신 임원이 많다. 패키지에는 고액 연봉, 차량 지원, 사무실 지원, 비서 등 인력 지원이 포함된다. 이 전무는 “임원 초년 연봉으로 4억~5억원을 받던 대기업 출신 임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대부분 중견기업에서는 1억원도 부담스러운 연봉”이라며 “조금 더 ‘헝그리’해져야만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헤드헌팅 시장에서는 평판 조회 비중이 커지고 있다. 한 헤드헌팅업계 관계자는 “성과는 회사별·직무별로 평가 지표가 다르기 때문에 평판 조회에서 ‘리더십이 있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퇴직 후 재취업에서는 사무직보다 기술 전문직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대형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한 간부는 “상무 한 명이 홍보 경력을 살려 언론사 광고팀으로 이동했고, 기술력을 내세워 정년이 지난 뒤 회사와 3년 더 계약을 연장한 현장소장도 적지 않다”며 “필요한 사람을 찾아 회사에서 먼저 발 벗고 나서기도 하는데, 확실히 기술직이 강세”라고 전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전문직’이 아니라 ‘전문성’이다. 전문가들은 요즘처럼 어려운 상황일수록 업종과 분야를 불문하고 전략·기획 전문가에 대한 채용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현재 헤드헌팅 시장이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슷하다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당시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후속 조치였던 반면 최근 단행되고 있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사뭇 다르다.
불황이 장기화할 것을 우려한 기업들이 선제 대응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시 희망퇴직을 적용하는가 하면 구조조정 대상 직급도 점점 늘리고 있다. 이 같은 구조조정은 장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김병화 기자 kb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