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버 택시·테슬라 전기차는 파괴적 혁신일까 아닐까?
지난 20년간 경영학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이론은 뭘까. 많은 경영학자들이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내놓은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꼽을 것이다.

이 개념을 ‘시장을 뒤흔드는 엄청난 혁신’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1995년 크리스텐슨 교수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파괴적 혁신은 그런 게 아니다. 시장 선도기업이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보다 고(高)사양의 제품을 만들고 가격을 높여 가는 사이에 소비자의 기대에 충실한 저(低)사양 제품이 싼 가격으로 치고 나와서 새로운 시장을 조성하고, 선도 제품이 ‘자신보다 못난’ 제품에 밀려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우버의 차량공유서비스나 테슬라의 전기차는 파괴적 혁신일까. 크리스텐슨 교수의 답은 ‘아니요’다. 그는 글로벌 컨설팅회사 딜로이트의 마이클 레이너 컨설턴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로리 맥도널드 교수와 함께 HBR 11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우버는 기존 시장 참여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저사양 제품이 아니고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시장을 새로 개척한 것도 아니다”며 파괴적 혁신의 요건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테슬라도 고사양 기업들이 흔히 추구하는 고비용의 ‘존속적 혁신’에 가깝고 파괴적 혁신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파괴적 혁신이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우버 택시·테슬라 전기차는 파괴적 혁신일까 아닐까?
크리스텐슨 교수가 우버와 테슬라가 파괴적이지 않다고 했다는 내용이 지난 17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기사화되자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생겼다. ‘파괴적’이라는 말을 전세라도 냈느냐는 것이다. 저스틴 폭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이튿날 ‘하버드대 교수 한 명이 파괴라는 표현의 독점권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글에서 미리암-웹스터 사전을 인용해 우버가 기존 택시 사업자의 사업 모델을 뒤흔들었으니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나 크리스텐슨 교수의 의지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개념을 ‘자유롭게’ 쓰고 있다. 대니얼 스노 미국 브리검영 경영대학원 교수와 네이선 퍼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HBR 11월호에 기고한 ‘프리우스식 혁신(The Prius approach)’이라는 글에서 에디슨의 전구 기술이라는 파괴적 혁신에 맞닥뜨린 가스등 업체들이 되레 전구의 필라멘트 기술을 응용해 가스등의 효율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에디슨에 맞서서 12년이나 시간을 벌고 에디슨을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게 했던 사례를 소개했다.

두 저자는 신기술과 구기술의 하이브리드를 통해 가스등 사업자들이 기술 혁신에 대응하고 사업전략을 새로 짜기 위한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가 휘발유(구기술)와 전기(신기술) 양쪽을 동력원으로 쓰는 데 빗대 프리우스식 혁신이라는 멋진 이름도 붙였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이 글을 봤다면, 분명 에디슨의 전구를 파괴적 혁신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미간을 찌푸렸을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에디슨의 전구는 가스등보다 기술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그러니 그의 기준에선 파괴적 혁신이 아니다. 테슬라의 전기차를 파괴적 혁신보다 존속적 혁신으로 분류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칼럼니스트 폭스의 지적대로 “‘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이 남용되는 것은 그것이 좋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업가와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프리우스식 혁신도 개념의 확장 과정에서 새로운 경영이론이 나온 사례다. 크리스텐슨 교수야 불만이겠지만, 학술적 엄밀함과 별개로 혁신이란 원래 그런 오용과 확장을 용인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 아닐까.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