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10월 서울대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사진 오른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 대통령, 최문환 서울대 총장, 백린 선생(안경 낀 사람). 서울대 중앙도서관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10월 서울대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사진 오른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 대통령, 최문환 서울대 총장, 백린 선생(안경 낀 사람). 서울대 중앙도서관 제공
서울대 규장각은 24만여점의 고문헌을 보관하고 있는 국학의 ‘보고(寶庫)’다.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만 1만여점에 국보 10종과 보물 25종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귀중한 자료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배경엔 한 사서(司書)의 남모를 노력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사서는 지난 9월 미국에서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백린 선생이다.

한국의 ‘사서 1세대’를 대표하는 백 선생이 규장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 서울대 도서관 사서로 부임하면서부터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규장각의 고서를 무사히 부산으로 옮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북한군의 1차 서울 점령 당시 그는 북으로 반출할 도서목록을 제출하라는 요구에도 지연작전으로 장서를 끝까지 지켜냈다. 1950년 12월엔 ‘승정원일기’ 등 국보급 자료 1만여권을 일일이 새끼줄로 엮어 미군 트럭을 통해 부산행 화물열차에 실어 보냈다. 생전엔 “혹시 책이 한 권이라도 없어질까 신혼에도 반 년이 넘도록 책 궤짝 위에서 잠을 자며 지켰다”며 부산 피란시절을 회고했다.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와선 북한군이 서울대 도서관의 장서 60여만권을 모두 서가에서 끌어내려 내팽개친 열악한 상황에서 자료를 수습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서울대를 방문했던 민영규 연세대 도서관장은 “천장에 닿을 듯 쌓인 고서 무더기 속에서 백 선생이 마치 광부처럼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한 권씩 책을 캐내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결국 ‘족히 20년은 걸릴 것’이라던 책 정리를 단 반 년 만에 마쳤다. 이후 규장각 자료 16만점을 현대적 목록법으로 정리하는 일도 완수했다.

1965년에는 규장각을 정리하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최치원의 ‘계원필경’ 등 고서 1028권을 일본으로 반출한 사실을 담은 1911년 조선총독부 문서를 처음 발견했다. 그의 공적으로 이들 자료 대부분은 1965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으로 반환될 수 있었다.

사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를 놓지 않았던 백 선생은 연세대에서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받고, 각 대학을 다니며 강의했다. 그는 늘 후배들에게 “사서는 단순히 책을 분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까지 파악할 능력이 있어야 진짜 사서”라며 “실력 있는 사서가 돼야 교수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제대로 봉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69년 미국 하버드대의 초청으로 1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다. 연수를 마친 뒤엔 아예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한국학 자료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아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한국학 도서 정리와 자료 전산화를 이끌어 옌칭이 미국 최고의 한국학 도서관으로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1년 은퇴 후 미국 보스턴에 머물며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뉴잉글랜드 한인사’ 등을 펴낸 백 선생은 올 9월30일 세상을 떠났다. 백 선생의 부음을 뒤늦게 접하고 국내에 처음 알린 이재원 서울대 중앙도서관 수서정리과장은 “선생의 뜻을 받들어 도서관을 목숨과 같이 소중히 여기는 후배 사서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