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그는 왜 쇼팽 집을 찾아갔을까
파리 몽마르트르 남쪽에 있는 낭만주의박물관. 30대 초반의 작곡가 쇼팽이 6세 연상의 작가 조르주 상드와 함께 살던 집이다. 정원 한편에 흰 조각상 ‘피아노 치는 쇼팽’이 있다. 그 곁에서 울려 퍼지는 새소리가 피아노 건반에서 나오는 듯하다. 집 안에는 쇼팽의 왼손과 상드의 오른손을 석고로 뜬 모형도 있다. 그 유명한 ‘피아노의 시인’의 손이 생각보다 작다.

콩쿠르 우승의 숨은 비결

쇼팽은 이 집에서 상드와 4년 동안 살았다. 병이 깊어 교외 별장과 지중해 섬으로 요양을 다니던 그는 상드와 헤어진 후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쇼팽이 죽기 전에 살았던 마지막 집은 플라스 방돔 12번지에 있다. 그 외에도 파리에는 쇼팽의 체취가 배어 있는 곳이 많다.

그가 떠난 지 160여년 후, 한 청년이 파리 시내의 쇼팽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그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쇼팽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 삶과 섬세한 감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이 낳은 ‘21세 쇼팽’ 조성진은 그렇게 해서 쇼팽과 한 몸이 됐고, 마침내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악보로만 만나던 쇼팽과는 전혀 다른 인간 쇼팽의 진면목을 보았다. 14세 때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다. 지난 1년간 그는 음악 해석과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쇼팽 스페셜리스트’ 케빈 케너의 레슨을 받고 피아노 거장 라두 루푸에게 조언을 받으며 피나는 연습을 거듭했다. 휴대폰까지 없앴다.

그도 쇼팽처럼 6세 때 피아노를 배웠다. 말이 없고 내성적인 면도 닮았다. 4세 때까지 말문이 안 터져 부모가 자폐증을 걱정할 정도였다. 자라면서도 말수가 적었다. 하루 6~8시간 피아노에 몰입하며 음악과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부모는 말없이 지켜보며 스스로 성장하게 놓아 두었다. 16세에 일본 하마마쓰 피아노 콩쿠르 최연소 우승, 18세에 러시아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3위 등으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리면서도 그는 말을 아꼈다. 몇 년 뒤 그는 “프로 무대에서 어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말수를 줄이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파리 유학도 혼자 내린 결정이었다. 하루 일곱 시간씩 불어 공부에 매진했고, 그 유명한 파리고등음악원에 혼자 시험 치러 가 합격했다.

음악 외적인 부분까지 체득

이제 21세가 된 그는 ‘21세기 쇼팽’으로까지 불리지만 여전히 말수 적은 연습벌레다. 만 스무 살의 쇼팽이 작곡한 피아노협주곡 1번의 선율은 로맨틱하면서도 애잔하다. 당시 쇼팽은 짝사랑하던 처녀에게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했다. 그 애틋한 감정이 협주곡의 느린 2악장에 녹아 있다. 그의 말마따나 쇼팽의 작품은 기품 있고 극적이며 시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내면의 깊이와 숨겨진 감성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파리에 머물던 쇼팽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음악 외적인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한 덕분이었다.

그의 우승 실황 앨범이 예약판매만으로 음반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는 내년 2월 예술의전당에서 쇼팽을 연주한다. 그 사이에도 그는 파리 북쪽의 페르 라세즈에 묻힌 쇼팽의 무덤이나 플라스 방돔 12번지의 마지막 집을 찾아가 ‘피아노의 시인’과 더욱 내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싶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