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는 작지만 늘 좋은 평판을 유지해온 어린이집 원장 L씨가 보육 외에 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은 규제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직접 설계 주문한 원목 미끄럼틀로 생긴 업무도 그중 하나다. 박봉의 자기 월급만큼인 구입비가 적잖은 부담이었지만 아이들이 신나 하는 게 보람이었다. 그런데 행정 지도인가, 현장 점검인가 구청에서 다녀간 뒤 새 일이 추가됐다. “예쁘다!”고 했던 구청 직원은 가로·세로·높이 규격보고를 요구했다. 며칠 후엔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그 다음은 미끄럼틀 안전교육 이수 요구였다.

끝도 없는 지도, 지침, 방침, 계획, 가이드에 의무 사항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안전교육 미이행 시 과태료도 만만찮았다. 이리저리 교육장을 수소문해 네 시간짜리 교육을 받으러 갔다. 자동차로 30분 걸렸으니 어린이집은 다섯 시간 원장 부재 상황이 됐다.

5만원낸 잡담수준 4시간 교육

정작 가관은 교육장이었다. 탈 없이 써온 실내의 작은 미끄럼틀에 대한 안전은 사실 원장들이 더 잘 안다. ‘전문 강사’의 건성건성 안전론은 30여분에 그쳤다. 그러더니 안전과는 상관도 없는 낡은 비디오를 켰다가 “이러려고 바쁜 원장들 끌어모았냐”는 항의를 받고 말았다. 그래도 정해져 내려오면 무조건 시간은 때워야 하는 게 한국식 행정이다. 강사는 잡담으로 시간을 채웠다. 강사가 당한 사기극 등등으로 네 시간 붙잡아둔 안전교육 수강비도 5만원이나 됐다. 안전 교육은 이것 외에도 연중 수시로 진행된다. 앞서 전기설비점검도 비슷했다. 무슨 공사라는 독점검사기관에서 나와 출입구 쪽 차단기 한 번 보고 5만원 받아간 게 전기안전 강화책의 실상이었다. 안전은 물론 중요하지만 실행방법이 틀렸다. 형식적인 안전교육 지침이 오히려 다섯 시간의 원장 부재 상태를 초래했다. 탁상의 공론은 대개 현실과 따로 논다. ‘미끄럼틀 안전대책’도 의욕만 앞섰다.

보육교사 수백 명을 불러모은 성폭력예방 교육도 비슷했다. 이 역시 의무사항이었다. 형식적인 교육에다 시장 국회의원들의 장황한 인사까지 오래 들어야 했다. 사람들만 모이면 용케 파고들어 온갖 아름다운 말로 정치 선전을 늘어놓지만 그들은 규제의 실상을 모른다. 금요일 밤늦도록 붙잡힌 채 받아든 건 조악한 김밥 한 줄이었다. 학부모 X씨가 황당한 경험담으로 L씨를 위로했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수입하는 X씨는 제품 색상만 빨간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꿨는데 서류들을 죄다 새로 제출해야 했다.

무상 보육 + 규제 = 하향 평준화

L씨는 이런 형식적인 대책수립이 잘한 행정으로 평가받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도움도 안된 네 시간의 신변잡담을 5만원 내고 듣도록 하는 게 꼼꼼한 행정, 우수한 안전대책이 된다. 미끄럼틀 안전만도 아니다. 소방, 성폭력 관련 증빙, 온갖 서식비치, 비용처리 증명…. 정원이 20명도 안되는 어린이집 운영에 간섭리스트는 수십 가지다. 주변에선 정원 미달로 죽네 사네 하는 와중에도 대기 인원까지 생기도록 밤새워 정성을 쏟은 L씨지만 이젠 자발적 폐쇄로 방향을 잡았다.

획일적인 무상보육으로 어린이집을 하향 평준화해 버렸다. 우월성 경쟁은 아예 봉쇄됐고 비전문가의 행정간섭은 갈수록 많아진다. 필요한 비용을 내더라도 좋은 보육을 찾겠다는 부모의 열의까지 막혀 버렸다. 획일적인 틀로 공산국가 탁아소처럼 옭아매면서 석사 원장을 보육현장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무상과 그에 수반되는 규제의 합작이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