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서울대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나와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창립멤버로 40여년간 석유화학업계에 몸담고 있는 허수영 롯데케미칼 사장(한국석유화학협회장)이 얼마 전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에게 보낸 편지다. 한국 최고 수준의 교육을 자랑한다는 서울대 공대조차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초공학 지식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쓴소리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논문 써내기에 급급한 공대로서는 무척 뼈아픈 고언(苦言)”이라고 말했다.
공대 교육이 위기다. 석유화학뿐만이 아니다.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주력산업의 교육과 연구가 갈수록 퇴보하고 있다. 한국 제조업이 엔저(低)와 중국 경제의 불확실성, 미국의 금리 인상 우려 등으로 ‘사면초가’에 직면한 가운데 고급 엔지니어 육성을 목표로 하는 공대조차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실한 공대 교육에서 미래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싹튼다”는 말까지 나온다. 높은 취업률로 입시에서는 인기를 누리는 한국 공대의 어두운 그림자다.
"기업·사회에 필요한 인재 못 키워"…주요 공대 학장 10명 중 9명 반성
주요 공대 학장들도 이 같은 인식에 공감했다. 한국경제신문이 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중앙대 포스텍 한양대 KAIST 등 전국 주요 대학의 공대 학장 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9명이 “한국의 공대가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학장들 모두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등 논문 실적 중심의 공대 평가를 의식해 논문이 잘 나오는 특정 분야의 교수 채용을 늘리고 있다”고 했다. 또 이들 중 8명(80%)은 공대가 갈수록 산업현장과 멀어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논문 실적 위주의 각종 평가를 꼽았다.
공대 학장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논문실적 위주의 획일적인 평가를 지양하고 각 대학별 특성에 맞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손봉수 연세대 공대 학장은 “연구중심대학과 산업현장 수요에 특화된 대학 간 역할을 나누는 방향으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진우 고려대 공대 학장은 “개별 대학이 설립취지와 특성에 따라 자율적으로 발전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성진 성균관대 공대 학장은 “현재 한국의 공대엔 구성원들의 교육·연구 성과가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는 기업가적 생태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며 “대학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기업가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창근 중앙대 공대 학장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과 정보를 대학이 공유할 수 있도록 대학과 산업계 간 상호 소통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설문에 응해주신 분들 (대학 가나다순)
△황주호 경희대 공대 학장 △박진우 고려대 공대 학장 △박석 서강대 공대 학장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 △송성진 성균관대 공대 학장 △손봉수 연세대 공대 학장 △김창근 중앙대 공대 학장 △이건홍 포스텍 공학장 △김용수 한양대 공대 학장 △이정권 KAIST 공대 학장
오형주/박상용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