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저지주의 뉴브런즈윅신학교 도서관에 있는 언더우드 흉상 앞에서 이 학교 김진홍 교수(왼쪽부터)와 존 코클리 교수, 그레그 매스트 총장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재연 기자
미국 뉴저지주의 뉴브런즈윅신학교 도서관에 있는 언더우드 흉상 앞에서 이 학교 김진홍 교수(왼쪽부터)와 존 코클리 교수, 그레그 매스트 총장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재연 기자
언더우드, 연희전문학교에 국내 첫 상과대 설립 "교육이 곧 선교"…조선 리더십 깨웠다
올해는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사진)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은둔의 나라’ 조선에 개신교를 전한 지 130년이 되는 해다. 이들의 선교 여정은 복음 전파를 넘어 개화기 한국 사회의 교육·의료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주최로 조선 최초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아 미국 동부 일대를 탐방했다.

뉴브런즈윅신학교에 있는 언더우드 흉상.
뉴브런즈윅신학교에 있는 언더우드 흉상.
지난 8일 미국 뉴욕에서 남서쪽으로 50㎞쯤 떨어진 뉴저지주 동부 뉴브런즈윅의 뉴브런즈윅신학교 도서관. 현관 바로 옆에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뒤로 빗어넘긴 남자의 흉상이 놓여 있다. 1885년 4월4일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고 이 땅에 개신교를 전파한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다. 흉상은 2011년 연세대가 기증한 것으로, 언더우드는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해외 선교를 준비했다.

1784년 설립된 북미 최초의 신학교인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도 언더우드는 3대 선교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 학교에는 그의 흉상뿐만 아니라 그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보낸 편지와 선교보고서 등 언더우드 컬렉션도 함께 전시돼 있다. 개교 230주년을 맞아 언더우드의 이름을 딴 기독교 글로벌 크리스천센터도 지난해 설립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는 열세 살이던 1872년 뉴저지주 허드슨카운티 북부에 있는 노스버겐으로 이주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대단했다. 유니언 힐 술집을 돌아다니며 종교 서적을 배포하다 쫓겨나기 일쑤였다. 1881년 뉴브런즈윅신학교에 입학해선 매일 구세군을 쫓아다니는 등 복음사업에 몰두했다. 교수들조차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계급 종파 인종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훗날 조선까지 올 수 있었던 바탕이 된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바탕으로 한 형제애였다.

언더우드가 처음부터 조선에 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인도 선교를 꿈꿨다. 당시만 해도 조선은 서구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나라’였다. 새로운 선교지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에도 조선으로 선교하러 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네가 가지 그래(Why not go yourself)”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스물여섯 살에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그는 조선의 첫 개신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국왕부터 천민까지 가리지 않고 만났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었다. 또 서울 경신중과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기독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로브개혁교회에 남아 있는 언더우드 묘비.
그로브개혁교회에 남아 있는 언더우드 묘비.
그가 살았던 노스버겐에는 그와 그의 가족이 미국에 정착한 뒤 다녔던 그로브개혁교회가 있다. 이 교회 공동묘지에는 그가 묻혀 있던 묘지 터가 남아 있다. 그는 1999년 한국으로 이장돼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지만 이 교회는 그의 묘지 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뉴브런즈윅신학교의 기독교 글로벌 크리스천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진홍 교수에게 1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언더우드 정신’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언더우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선교를 계획했고, 동료 선교사들이 반대하는데도 YMCA와 일반대학 설립을 고집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언더우드는 단순히 한국에 기독교 정신을 심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종교의 토착화를 바탕으로 미래에 조선이 중요한 리더십을 지닌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가 가진 중요한 의미는 ‘교육’을 통해 선교를 꽃피웠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 대학 최초로 연희전문학교에 상과대를 세웠다. 1915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할 때만 해도 북장로교 선교사 측에서 반대가 많았다. 조선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직업의 귀천이 있다고 믿었던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시대가 변화했을 때 조선이 세계에서 리더십을 가진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업적인 안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김 교수는 “그 자신이 잉크공장, 언더우드 타자기회사 등을 운영했던 집안에서 자란 것도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근현대사의 숱한 곡절을 딛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이면에 선교를 넘어서는 언더우드의 이런 안목과 애정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노스버겐·뉴브런즈윅(미국)=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