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연암 박지원과 정하상 바오로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대 지식인 사이에서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춘추절(황제의 70세 생일잔치)에 간 사신들과 동행한 이야기를 엮은 여행기다. 뛰어난 문체로 새로운 문물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박지원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학식이 높았고, 작문 실력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에 비유될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을 가진 훤칠한 외모의 호인이었다. 벼슬길에 나서는 대신 박제가와 이덕무, 이서구 등과 신분 및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우정을 맺으며 이른바 ‘연암 그룹’을 형성했다. 북학파로 불린 이들은 함께 모여 세상 이치를 연구하고 시를 지으며 신문물에 대한 지식을 나눴다.

당시 조선엔 “명나라를 받들고 청나라를 배격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박지원은 마흔네 살에 청나라에 갔다. 그가 직접 경험한 청나라는 조선보다 앞선 선진 문물이 가득한 세계였다. 그는 조선의 식자들이 ‘되놈들의 세계’라고 무시하던 청나라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로운 문물을 합리적으로 수용했다. 일례로 청나라 벽돌집에 관심을 가진 그는 관직에 오른 뒤 벽돌을 활용해 무너진 건물을 보수하기도 했다.

정하상 바오로 또한 중국이라는 큰 세계를 경험하고 천주교를 전파한 사람이다. 정하상은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이자 19세기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의 조카다. 그는 하급역관의 종복이 돼 중국에 9차례 다녀온다.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짐으로써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다.

연암 박지원은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고 가치를 찾아내 그 이로움을 널리 전파한 선각자로 살았다. 정하상 바오로 또한 이성적 사고와 열린 자세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였다.

사물과 현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좋은 점이 있다면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큰 힘이 된다. 타인의 대화를 경청하는 자세야말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첫걸음 아닐까. 청년 실업 문제와 국가 경제 활성화 등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열린 시각과 국민 모두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석 <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seok.cho@khnp.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