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슬픈 민주주의, 그리스
그리스를 유럽에 속한 나라로 만든 사람은 시인 바이런이다. 그는 그리스에 시를 바쳤고 글을 썼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오스만튀르크와의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영국 독자들에게 써보낸 그리스통신은 그를 ‘자고 나니 유명하게’ 만들었다. 에게해를 헤엄쳤고 여인들을 사랑했다. ‘아테네의 아가씨여, 우리 헤어지기 전에’라는 애절한 시도 있다.

아테네의 아가씨여, 우리 헤어지기 전에/돌려주오, 내마음 돌려주오/ 아니 기왕에 내 마음 떠날 바엔/ 나머지도 모두 가져가오/ 나 떠나기 전에 나의 약속 들어주오/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온몸을 던져 그리스 독립투쟁 군자금을 모금했던 그에 대한 추념은 아테네 시청사 앞에 모셔져 있는 동상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 서구문명의 근원을 찾았던 낭만주의 시대의 충직한 아들이었다. 바이런을 유혹했던 여인들은 마리아 칼라스,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들에 실려 지금도 세계를 홀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민주주의는 진즉에 실종 상태다. 오는 7월5일 치러질 국민투표는 위로부터 동원되는 항쟁일 뿐이다. 총리가 반대투표를 호소하는 뒤집힌 민주주의는 정치가 얼마나 뻔뻔해 질 수 있는지, 국민들의 얼굴이 얼마나 두꺼워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그리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적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501명의 배심원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 받았다. 1차 투표에서 무죄를 평결한 배심원단 중 80명이 2차 투표에서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주라고 함성을 질렀다. 해거름의 짧은 순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가 망한다는 소식이 소크라테스가 죽었다는 소식보다 더 빨리 그리스 전역에 당도할 것이라며 군중을 저주했다. 지금 2000년 전 사건이 재연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오늘 저녁 그리스 디폴트 소식은 오는 5일 국민투표 소식보다 이미 앞서 달리고 있다. 개개인의 뻔뻔함을 은폐해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사람들은 투표장에 들어서면서 근엄하게 이죽거리고, 엄숙하게 비열해진다.

위기 4년차인 그리스는 2012년 이후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잃었다. 4년의 내리막길은 진실에 직면할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채권단이 지난주 새로 내놓은 조건들은 삶의 질을 적어도 10% 추가 삭감한다. 그리스 국민들은 비굴하게도 좌익 정권을 선출하는 방법으로 채권단과 흥정해왔다. 이제 그 전술조차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우선 세금이 올라간다. 호텔과 식당 부가세는 13%에서 23%가 된다. 외식 없이는 못 사는 국민에게 꽤 고통이 될 것이다. 연금개시 연령은 65세(여성은 60세)에서 67세로 올라간다. 법인세는 26%에서 28%로, 6200만원 이상 고소득자에게는 부유세 인상, 사치세 부과, 공기업 민영화, 공무원 임금 동결, 재정지출 삭감 3~4.5%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들의 연금분담금을 지금의 6억5000만유로에서 15억6000만유로로 인상하는 안도 포함된다. 이런 조건으로 155억유로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채무조정일 뿐 뉴머니는 없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국민들로서는 구제금융의 ‘구’자도 구경해본 적 없다. 부채라고는 하지만 쓸 때는 푼돈이고 갚을 때는 목돈이다. 그것은 코린트의 시시포스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다. 또 거대한 바위를 날카로운 산정으로 밀어올리는 일이다. 부채는 그렇게 스스로를 증식해 간다.

앞날도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올리브 열매 공장 하나 못 돌리는 제조업 전멸의 나라다. 올리브 나뭇가지는 올림픽을 빛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열매는 이탈리아로 수출되고 가공을 거쳐 그리스로 다시 수입된다. 관광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나마도 한국 관광객을 위해 이제는 밤 늦게라도 식당 문을 열어야 한다. 그게 그리스의 앞날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머지않아 닥칠 한국의 미래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 이후 벌써 10년 이상을 놀고먹는 나라 만들기에 온 국민이 몰입해 왔다. 그리스에도 한국에도 슬픈 민주주의의 종말이 다가온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