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한국에서 발병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확진자 증가 속도가 확 꺾이는 등 진정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한 달간 중동에서 날아온 메르스는 직장 안팎의 풍경을 많이 바꿨다. 지난달 메르스 사태로 바뀐 김과장 이대리의 삶을 살펴봤다.

대비, 또는 유난…전전긍긍 직장인들

“미세먼지 때문에 사놓은 KF94가 있긴 한데 그걸로는 안 될 것 같아. 방역용 NS95로 빨리 주문해야겠어.”

한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 대리(33·여)는 한 달 전 회사 동료들에게 호들갑을 떨며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동료들은 “그게 뭐냐”며 어리둥절해 했다. 심지어는 “무슨 총 이름이냐”고 되묻는 동료도 있었다. M16, AK47 같은 소총 이름을 떠올린 것이다.

원래 유난히 건강 챙기기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총이 아니라 마스크 모델이야 이것들아. 지금 전쟁 중이나 다름없다고.”

김 대리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한 바로 그날 20개들이 방역용 마스크 두 상자를 주문했다. 가격은 마스크 하나에 2000원가량. ‘가격이 비싼 게 흠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위생적으로 하루에 하나씩 쓰고 버리기 위해서는 물량을 넉넉히 확보해야 했다. 메르스 사태가 한 달을 넘기면서 그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처음에 사 놓은 마스크가 10여개밖에 남지 않아서다.

‘진정 단계로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게 김 대리의 생각. ‘초기에 더 많이 입도선매했어야 하는데….’ 김 대리는 지금부터 이틀에 한 장씩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정 대리(32·여)도 최근 메르스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회식 때문이다. 취소되길 간절히 바랐지만 팀장은 “메르스 같은 거 신경 쓸 필요 없다”며 회식을 강행했다.

삽겹살집에서 깔끔하게 자기 잔으로 폭탄주를 마신 것까진 좋았는데, 2차로 노래방에 간 게 문제였다. 정 대리는 2009년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다가 신종플루에 걸려 죽다 살아났던 ‘트라우마’가 있다. 친구 중 한 명이 신종플루에 걸린 걸 모르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가 같이 갔던 사람들이 모두 옮았던 것. “막내 노래 한 번 들어보자”는 선배들의 권유를 거의 싸우다시피 하며 거부했던 정 대리. 그는 요즘 “지난 회식 자리에서 너무 유난 떨었던 거 아니냐”는 선배들의 핀잔을 듣고 있다.

“이때 즐기자.” 놀이공원 찾는 김과장 이대리

현 과장(36·여)은 3년째 KTX로 천안아산역과 서울역을 오가며 출퇴근한다. 충남 아산 삼성전자 사업장에 근무하는 남편과 서울역 근처에 직장이 있는 본인의 상황을 감안해 천안아산역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제는 몸이 장거리 출퇴근에 적응한 것도 같지만, 항상 바랐던 게 ‘퇴근 때 앉아서 좀 가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오후 8시께 주로 퇴근하는 현 과장이 지난 3년간 자리에 앉아서 내려가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한 달 동안은 ‘이게 평소 내가 타던 KTX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메르스 때문에 평일 KTX가 텅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몸이 편해지기는 했는데, 메르스 때문에 자리에 앉는 게 왠지 찝찝하기도 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메르스 때문에 공공장소에 사람이 줄어든 상황을 ‘즐기는’ 직장인도 있다. 김 과장(38)은 다섯 살 아들과 최근 2주 연속으로 주말에 경기 용인 에버랜드와 어린이를 위한 직업체험 테마파크인 서울 잠실 키자니아에 다녀왔다. 메르스 사태로 온 나라가 걱정이었지만, 평소 “바쁘다”는 이유로 아들과 놀 시간을 내지 못했던 김 과장에게는 지금이 기회였다.

“사람 많은 데 아이를 데려가는 건 좋지 않다”는 부인의 걱정에는 “이럴 때일수록 놀이공원에 가주는 게 내수경기 회복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가볍게 받아쳤다. 김 과장과 아들은 평소 같았으면 문이 열리자마자 정신없이 뛰어가도 앞줄에 서기 힘들었던 에버랜드 사파리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에버랜드나 키자니아나 체감상 평소에 비해 손님이 50~70%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

박 대리(32)도 김 과장과 비슷한 상황이다. 박 대리가 최근 주말을 이용해 찾은 곳은 야구장. 그의 여자친구는 남들이 알아주는 ‘야구광’이다. 평소 주말 여자친구와 야구장에서 데이트할 때는 주로 외야석이나 응원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좋은 자리를 예약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응원단 바로 앞 ‘꿀좌석’에서 신나게 경기를 즐겼다. 센스 있게 손소독제까지 챙겨 점수를 딴 것은 덤이었다.

생계 위협받는 서비스업 종사자들

메르스 탓에 생계를 위협받는 직장인들도 있다. 회사 실적이 내수경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서비스업 종사자가 대부분이다. 가수 매니지먼트를 주로 하는 연예기획사에 다니는 안 대리(30)는 최근 업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년 중 가장 행사가 많다는 5~6월에 사실상 개점휴업 사태를 겪고 있다.

메르스 사태가 발생한 이후 잡힌 행사는 대부분 취소됐다. 보다 못한 사장은 안 대리에게 “출연료를 50% 이상 깎는 한이 있어도 행사를 놓치지 마라”는 특명을 내렸다. 하지만 지난주부터는 행사 출연을 문의하는 전화가 단 한 통도 오지 않고 있다. 소속 가수들은 매일 숙소와 연습실만 오가고 있다.

“사장님 눈치, 가수들 눈치 보느라 가운데서 죽겠습니다. 매니지먼트업계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일부 메이저 회사를 제외하고는 운영하기 어려운 곳이 대부분이에요. 이런 상황이 하반기에도 지속되면 회사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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