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청년 백수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
미국 볼티모어 소요 사태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언론들은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 갈등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다. 볼티모어, 특히 사건의 진앙이었던 도심 샌드타운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볼티모어는 메릴랜드주의 최대 도시다. 메릴랜드는 미국에서도 가장 잘 사는 주 가운데 하나다. 그렇지만 볼티모어는 다르다. 조선 제철 등 굵직한 제조업이 퇴조한 지 오래다. 늘 일자리 부족에 허덕이는 지역이다. 이 도시의 지난달 실업률은 10%다. 전국 평균의 2배에 육박한다. 샌드타운은 어떨까. 노동가능연령(15~64세) 인구 가운데 놀고 있는 사람이 무려 51.8%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직업이 없다는 얘기다. 미국 전체의 실업률은 5.4%다. 흑인의 실업률도 10% 밑으로 떨어졌다. 소요 사태를 인종 갈등 탓만으로 몰아갈 수 없는 이유다.

혹자는 샌드타운 사태의 원인을 빈부격차라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그건 일자리 부족의 결과를 단선적으로 표현한 데 불과하다. 일이 소득의 원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이란 무엇인가. 힘든 노동일 수도, 생계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진 사회라면 일은 보람과 더불어 인생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수단일 것이다.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자리가 없어 취업전선을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실업은 경제적 고통 차원을 넘어 자존심과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분노의 씨앗이 된다.

4년 전 월가 점령 시위도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이 시위의 원인을 1% 대 99%의 빈부격차 탓으로 돌리며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난했지만, 근인(根因)은 결국 일자리였다. 청년 실업률이 16.8%나 됐던 시기다. 금융위기 탓에 등록금 대출 부담은 커지는데 취직은 안 되고, 서브프라임 후폭풍으로 집값 고통까지 가중되는데 청년 백수들의 분노는 어디를 향했겠는가.

미국의 실업률은 정부의 고용 확대 노력에 힘입어 중앙은행(Fed)이 ‘꿈의 실업률’이라고 일컫는 수준까지 낮아졌다. 지난해 창출된 일자리가 295만개다. 6개월 이상 장기 실업은 28.2% 줄었고 시간제 근로자 또한 12.6% 감소했다. 지금 월가에 점령 시위 따위는 없다.

한국의 청년 실업률이 지난달 10.2%까지 높아졌다. 관련 통계를 처음 작성한 2000년 이후 최고치다. 취업준비생 등 ‘사실상의 실업자’를 감안한 청년 체감실업률은 11.3%나 됐다. 사정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 같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기업의 수익성은 갈수록 나빠지는데 정년연장 통상임금 등 신규 고용의 발목을 잡는 악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적어도 5~6년은 ‘고용절벽’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줄을 잇고 있다.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 고용 창출의 원천인 기업에 딴죽을 거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용 확대의 전제 조건인 노동시장 개혁에까지 분탕질을 해대는 걸 보면 국회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임금피크제와 같은 보완 대책은 쏙 빼놓은 채 정년만 연장해 놓았다. 70만명의 청년에게 일자리를 찾아준다는 일자리 창출 법안이 국회에서 낮잠을 잔 건 벌써 2년째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400만 표가 보장된다는 공무원연금 포퓰리즘에 몰두한 탓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대표성이 약한 한국노총을 파트너로 삼아 노사정위원회를 진행한 것도 한심한 일이지만, 대타협이 무산됐는데도 어떻게 해보겠다는 제스처조차 없다. 노조는 초강경 투쟁을 고수하고 있고, 국회·정부는 포퓰리즘 정책만 쏟아낼 뿐이다. 정규직만을 보호하는 노동 기득권자들의 천국이다. 그 사이 청년 백수의 가슴엔 분노만 쌓여간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간다.”(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대졸 백수만 50만명이다.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온다면 어쩔 텐가. 국회 점령, 정부 점령이 기우(杞憂)일까. 걱정스럽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