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가 주방에서 목숨을 걸고 결투한다. 늘씬한 악녀가 식칼을 휘두르자 뚱보 여자는 과일과 채소, 칠면조를 던지며 맞선다. 뚱보는 프라이팬으로 악녀의 이마를 여러 차례 타격해 쓰러뜨린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본부의 내근 직원이던 그는 외근 요원이 피살되자 적에게 얼굴이 노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형 핵탄두 탈환작전에 전격 투입됐다.

오는 21일 개봉하는 폴 페이그 감독의 코믹 첩보영화 ‘스파이’는 첩보물의 대명사 격인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철저히 패러디했다. 근육질 미남 본드가 아니라 평범한 뚱보 여인 수잔 쿠퍼(멀리사 매카시 분)가 첩보원이다. 목숨이 위태로워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본드와 달리 쿠퍼는 현장에 뛰어들기 전 겁을 낸다. 임무를 완수한 본드는 여인과 즐거운 밀월여행을 즐기지만 쿠퍼는 취중에 근육질 남자와 잔 뒤 후회한다.

이 영화에서 액션의 중심은 뚱보 스파이 쿠퍼 역의 매카시다. 유명 액션배우 제이슨 스타뎀과 미남 배우 주드 로가 첩보원으로 등장하지만 이내 위기에 빠지고 매카시가 그들을 구해준다. 스타뎀은 시종 허세와 과장으로 뭉쳐져 있다. 매카시가 악당을 추격하기 위해 헬기에 매달리자 스타뎀은 매카시의 다리를 붙들고 매달렸다가 물속으로 추락한다. 로도 ‘허당’ 첩보원이다. 알레르기 때문에 재채기를 하다가 오발탄을 날려 상대를 죽이는 실수를 범한다. 그 상대는 원폭의 행방을 알고 있어 사로잡아야 했다.

매카시 액션의 절반은 유머다. 자신보다 작은 모페드를 타고 적을 추격하려는 찰나,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진다. 객석은 웃음바다다.

코믹 첩보영화는 진지한 첩보영화가 넘쳐나면서 싫증이 난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준다. 페이그 감독은 본드와 정반대에 있는 캐릭터인 쿠퍼를 창조했다. 무엇보다 첩보물에서 홀대받았던 여성의 역할을 극대화했다. 핵폭탄을 소유한 악당 수괴도 여자다. 첩보물에 공포와 유머를 섞어 변주했던 ‘킹스맨’처럼 ‘스파이’는 첩보물의 또 다른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