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약현(藥峴)
“중림동성당을 왜 약현(藥峴)성당이라고 부를까요?” 봄비 속의 점심 산책길. 고개를 갸웃대던 후배가 우산 사이로 묻는다. “예전에 이 언덕이 약초재배지였대.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 해서 약전현(藥田峴)으로 불렸는데, 이게 점점 줄어서 약현이 됐다는군. 약초고개에 지은 성당이라…, 뭔가 운치가 더 있잖아?”

약현은 서울역에서 만리재 쪽으로 이어지는 중림동의 옛이름이다. 한때는 약전중동(藥田中洞)으로도 불렸다. 조선시대 장안에 약을 공급한 ‘가운뎃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에 따르면 조선 명의 허준도 이 동네에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곳에 약현성당이 들어선 것은 1892년이다.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빠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 건물이자 첫 고딕식 성당이다. 1896년 최초의 사제 서품식도 여기서 열렸다. 조선 천주교 첫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의 집이 이 근처에 있었다. 천주교 박해 때 44명이 순교한 서소문(西小門)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어서 더 의미있다. 드라마 촬영 명소로도 인기다.

서울 명주인 약주(藥酒)의 본고장도 여기다. 조선 시대 문신 서성의 집이 이곳에 있었는데 이 집에서 빚은 술이 최고여서 붙은 이름이다. 그의 호가 약봉(藥峰)인 것도 재미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좋은 청주를 빚은 서성의 집이 약현에 있어 그 술을 약산춘이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약산춘이 곧 약주, 좋은 술의 통칭으로 쓰였다. 일설에는 서성의 어머니 이씨 부인이 남편 사후 술장사를 할 때 워낙 솜씨가 뛰어나 ‘약현술집’이 소문난 데서 생겼다고도 한다.

조선 말기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도 여기에 살았다. 성당 앞 삼거리에 1991년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인근의 양정고보 자리에는 손기정공원이 조성돼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 선수가 썼던 월계관과 같은 수종인 손기정월계관수도 자라고 있다. 키가 15m를 넘는다. 그 옆의 만리재는 세종 때 최만리(崔萬里)가 살던 곳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성당 앞 서울역고가도로는 곧 보행녹지공원으로 바뀔 예정이다. 서울시는 서울역 반경 1㎞ 지역을 새로운 성장동력지역으로 키우겠다고 한다. 컨벤션센터와 호텔 오피스텔 등으로 구성된 ‘강북판 코엑스’도 생길 모양이다. 약현성당과 서소문공원을 역사관광지로 개발해 국내외 관광객까지 유치하겠다니 더욱 반갑다. 저만치 봄비 속으로 소곤거리며 가는 성지순례객들의 우산 행렬이 벌써 정겹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