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호주 한국의 10개 기관이 참여해 제작하는 25m급 세계 최대 광학망원경인 거제마젤란망원경(GMT) 가상도. 한국천문연구원 제공
미국 호주 한국의 10개 기관이 참여해 제작하는 25m급 세계 최대 광학망원경인 거제마젤란망원경(GMT) 가상도. 한국천문연구원 제공
상대성 ‘이론’과 소설 작법의 ‘이론’은 같은 뜻을 담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혀 아니다. 자연과학의 이론은 가설에서 시작해 깊이 있고 엄밀한 사고를 거쳐 이론으로 명명된다. 소설 이론, 평화 이론 등은 개별 관측 자료 간의 연관성을 파악해 묶어서 설명하는 행위다. 과학자들은 문화이론가들이 일상 속에서 너무 쉽게 끄집어낸다고 불평한다. 문화이론가들은 과학자들이 깐깐하고 거시적 관점이 없다고 비판한다. 같은 말을 써도 의미가 다를 정도로 동떨어진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책마을] 연금술과 점성술이 어떻게 현대과학을 만들었을까
《과학한다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하이델베르크대 과학사 교수인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쉽게 과학을 평가절하하는 풍경을 봐왔다. 거꾸로 과학계에 몸담은 전문가들이 문제의식 없이 개별적 연구 대상에만 천착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글쓰기에 집중해온 이유다. 저자는 독일 쾰른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땄다.

피셔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던 날을 뚜렷이 기억한다. 교장은 “물리, 화학이나 생물 등 자연과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기쁜 일이다”면서도 “하지만 그가 성숙했는가는 독일어 성적을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피셔는 “자연과학은 교양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 문학 교수의 일화도 들려준다. 무지와 몰이해에서 오는 교만이 심각하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가 택한 해법은 ‘사람’이다. 모든 근대 자연과학의 출발 이념은 인간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었다. 사람을 살펴본다는 것은 곧 과거를 되짚어본다는 뜻이다. 피셔는 어떻게 연금술과 점성술에서 현대 과학이 태동했는지,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사고 방식이 어떻게 DNA 분석의 기원이 됐는지 등 과학사의 각 장면을 조명하는 것으로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예컨대 원자(原子)의 아버지로 불리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똑같이 타당한 ‘상보성’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칸트 철학의 중심 개념인 ‘물자체(物自體)’와 맥이 닿아 있다. 과학자에게 전자 자체나 빛알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없고 관찰된 현상으로서만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칸트는 ‘어쨌든 완전히 비결정적인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라고 서술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고유 분야에 관한 질문에는 쉽게 답하면서 인간 생활에 중요한 진짜 ‘문제’에는 익숙지 않은 점도 지적한다. 진공 상태에서 빛의 속도가 얼마인지는 거침없이 말하지만 미래에 어떤 에너지원을 써야 하는지 등 ‘의미’를 물으면 머뭇거린다는 것이다. 과학도 다시 인간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독자 누구나 과학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책의 목표지만 일반 독자에게 더디 읽힐 수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양자역학부터 유전공학까지 과학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고 있어야 페이지가 쉽게 넘어간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