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현의 데스크 시각] "증권사를 망하게 놔둬라"
마이클 밀컨은 정크본드 시장을 창출한 주인공이다. 정크본드는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가 발행해 말 그대로 쓰레기 취급받는 채권을 말한다. 그가 처음 시작한 정크본드 거래는 자본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영세 창업회사가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80년 이후 본격화한 미국의 벤처 창업, 기업 인수합병(M&A)은 정크본드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게 정설이다. 1990년대 벤처 거품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을 탄생시킨 미국의 역동적 산업환경엔 정크본드가 중요한 자양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만일 밀컨이 오늘날 한국에서 태어나 증권회사에 입사한다면 어떨까? 그가 1970년 미국 뉴욕의 드렉셀 번햄 램버트 증권사에 갓 들어갔을 때처럼 거의 두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그때와 같이 광부들이 사용하는 랜턴 모자를 쓰고 지하철 안에서 책을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혁신적인 상품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인' 마이클 밀컨이라면

정크본드는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딱지가 붙은 위험 채권이다. 만일 이것으로 펀드라도 만들겠다면 정부는 펄쩍 뛸 것이다. 투기적 거래를 하다가 투자자가 손해를 보면 책임질 거냐며 손사래를 칠 게 분명하다. ‘안전한 시장’에 집착해온 정부를 보면 이 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다. 2011년 39억2800만여건으로 세계 1위를 기록한 한국의 파생상품 거래량이 작년 6억여건으로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도 같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밀컨은 내부자거래 등 98건의 죄목으로 감옥에 가는 비참한 말년을 맞았다. 그러나 그가 개척한 정크본드 시장은 하이일드펀드와 상장지수펀드(ETF) 탄생의 토대가 되면서 자본시장은 진일보했다는 것이다. 뱅커스트러스트는 한때 글로벌 파생상품 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하다가 망했지만 장외파생상품 시장을 발전시킨 큰 자취를 남겼다. 성장의 역사는 이처럼 ‘안전한 시장이 최선’이라는 면피적 사고에선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밀컨과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간절함, 뱅커스트러스트처럼 망해도 좋다는 도전 의지가 빚어낸 혁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공허한 금융허브

금융허브 육성론은 그래서 공허하게 들린다. 소득공제장기펀드 가입 요건을 연소득 5000만원으로, 헤지펀드 거래 최소 금액은 5억원으로 묶어 시장 참여자를 소수로 제한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해외 펀드에 국내 운용사를 통해 가입하면, 외국 금융회사에 인터넷으로 연결해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데도 개선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국내 수요를 늘려 새로운 상품 개발을 유도하기보다는 그저 사고날 가능성을 줄이는 데 급급하다는 것은 도처에서 드러난다.

투자자가 손실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요구하고, 증권사가 정크본드 같은 상품을 만들거나 장외파생상품을 대규모로 거래하다가 망하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 그런 혁신이야말로 자본시장 발전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밀컨이 ‘자본가의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안전한, 그래서 발전할 수 없는 시장’을 지향하는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주현 증권부장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