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매력에 빠진 2030, 만년필 잡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김준수 씨(31)의 취미는 ‘손글씨’ 쓰기다. 복잡한 일이 생길 때마다 소설이나 에세이의 한 구절을 베껴 쓴다. 김씨는 “좋아하는 작가의 명문장을 따라 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정상희 씨(29)도 시나 소설 속 명구절을 만년필로 베낀 뒤 사진을 찍어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다. 정씨는 “손글씨를 SNS에 올려 내가 느낀 감정을 공유하면 마음이 뿌듯해진다”며 즐거워했다.

흘러간 취미라고 여겨지던 손글씨와 필사(筆寫·베껴 쓰기)가 2030세대를 중심으로 부활하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자신이 쓴 글씨를 자랑하는 것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23일 사진 전문 SNS인 인스타그램에 손글씨란 주제어로 올라온 사진은 29만2000장(누적 기준)이 넘는다. 하루에 2000장 가까이 올라오는 추세다. 컴퓨터나 스마트 기기의 발달로 손글씨를 쓸 일은 줄었지만 글씨 쓰기가 젊은 세대의 새 취미로 떠오른 것.

손글씨와 필사가 인기를 끌면서 만년필 매출도 증가하고 있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1월23일~2월22일) 만년필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55% 늘었다. 최근 6개월 기준으로도 전년 동기 대비 40% 증가했다. 옥션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컬러링북이 유행하면서 섬세한 글쓰기가 가능한 만년필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박종진 만년필연구소장은 “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인 ‘펜후드’에 가입하는 20대 여성이 크게 늘었고 이들이 손글씨 유행을 이끌고 있다”며 “20대는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만년필 같은 아날로그적 도구도 쉽게 받아들여 손글씨를 쓰고 SNS에 올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에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손글씨 매력에 빠진 2030, 만년필 잡다
손글씨가 왜 유행하고 있을까. 다양한 글쓰기로 ‘문장 노동자’란 별명을 가진 장석주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베껴 쓰면 작가가 문장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며 필사의 장점을 설명했다. 장 시인은 “신경숙,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유명 작가도 그들이 흠모하는 선배의 작품을 따라 쓰면서 문장 수련을 했다”며 “요즘 주목받고 있는 DIY(do it yourself)북 관점에서 봐도 글씨를 쓰는 일은 심리적 안정과 치유 효과를 준다”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해 출판계에서도 필사를 다룬 책을 속속 출간하고 있다. 따라 쓰는 논어(윤용섭 지음, 예문)는 논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글과 원문을 따라 쓸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나의 첫 필사노트(새봄출판사)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상의 ‘날개’, 김유정의 ‘봄봄’을 수록해 이를 베껴 쓰면서 작품 속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장 시인도 명문장 100개를 소개하는 필사 안내서를 상반기에 출간한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