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대통령 신뢰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지금 정가의 관심은 인적 쇄신이란 네 글자에 쏠려 있다. 십상시 농단, 불통 논란 등으로 비롯된 위기를 헤쳐나가는 마지막 수순, 화룡점정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데 박근혜 대통령의 장고가 계속된다. 아마 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왜 내치느냐는 게 박 대통령의 속내일 것이다. 국정농단? 이미 터무니없는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나. 분위기에 밀려 측근을 갈아치우라니 천부당만부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다.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국민의 눈높이와 정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신년 회견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게 됐다. 불을 끄기보다는 키웠고 국민의 울화를 달래기보다는 악화시켰다.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추상같다. 정치는 정의의 법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곧 3년차를 앞둔 박근혜 정부는 엄중한 위기에 빠졌다. 신뢰의 위기다. 지금 이 시점 최대의 당면과제는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면 바로 3년짜리 대통령 신뢰 회복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우선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관료들의 인적 쇄신을 요구하는 민심을 언론이나 야당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듯이 민심이 나빠진 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다. 성추문이나 비리, 비서진 사이의 권력다툼 등 근거가 많다. 이런 문제들을 다잡지 못하고서는, 그 책임을 분명히 따지지 않고서는 기강이 서지 않는다. 그동안 역대 정부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문제들이 생겼는데 누가 제대로 책임을 졌다는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민심은 통렬하다. 왜 싸고도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결국 일에 달려 있다. 신뢰는 문제 해결을 통해 회복된다. 문제 해결 능력, 즉 정책역량 발휘는 장관들의 몫이다. 그러나 연말정산 파동이나 지방세 인상 번복, 건강보험료 개선안의 파행 등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만드는 경우가 속출했다. 원칙도 소신도 능력도 없는 ‘3(無) 정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청와대 차원에서 그 원인을 진단했을 터, 정책 혼선과 컨트롤타워 부재 등 문제 인식은 적확했다. ‘정책조정협의회’ 신설, ‘정책점검회의’ 정례화라는 대안이 나왔다. 그러나 그동안 국정조정기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회의가 부족해서 정책 조율이 안 된 것도 아닌데 협의기구를 늘린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힐난을 면치 못했다.

대통령 앞에서 장관들의 표정은 마치 시험을 앞둔 수험생 같은 인상을 줬다. 정책 주관자로서 관록과 자신감보다는 무언가 쫓기는 듯한 느낌, 잘못 걸리면 안 되니 정신 바짝 차리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골프 해금은 공직자들의 골프장 이용 확대라는 직접적인 경제 효과보다는 경제 전반에 대한 일종의 시그널 효과 때문에 기대를 자아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숨은 그림이 있었다. 혹 대통령과 장관의 관계, 장관 행태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기대가 그것이다. 장관이 쫓기면 관료들이 따라가고 부처 간 조율이 소홀해 정책 실수나 혼선의 위험이 커진다.

그런 뜻에서 청와대의 정책조정기능을 강화한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처방이었다. 어쩔 수 없었고 더욱이 틀린 답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일상으로 굳어진 장관의 ‘수험생 모델’에 있다. 이래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장관이 정책의 주체로 소신과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하려면 인사권이 전제돼야 한다. 대통령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비서실과 측근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장관들에게 힘을 실어줘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대통령 신뢰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토론문화 활성화나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우문현답’은 그 다음 일이다. 3년 후 성공한 대통령으로,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일 잘한 대통령으로 웃으며 걸어 내려올 수 있기를 바란다.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joonh@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