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어 스트레스로 자살한 기업 부장급 직원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 해외 파견을 가지 못한 데 따른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극단적 선택으로 이끌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대한민국 성인들에게 영어는 스트레스 그 자체다. ‘부모가 자녀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스펙’으로 영어 실력이 직장이나 연봉, 학력, 외모 등을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는 한 교육업체의 설문 결과가 지난달 나온 적 있다. 한국 성인의 영어 실력이 세계 비영어권 국가 가운데 24위를 차지했다는 글로벌 영어교육업체의 지난해 11월 조사는 충격적이다.

퇴보하는 성인 영어 실력

한국 18~24세의 영어 점수 평균은 글로벌 평균보다 3.63점 이상 높아 아시아에서 싱가포르에 이어 두 번째로 높지만 25~34세에서는 전 세계 평균을 밑돌고, 35~44세 그룹에서는 아시아 평균보다도 낮았다는 것이다. 커리어 활동이 왕성해지는 청·중년층으로 갈수록 영어 실력이 점진적으로 향상되는 글로벌 추이와는 정반대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의 영어 실력이 모두 출중한 것 같지도 않다. 만점 수준의 토익(TOEIC) 성적표를 입사지원서에 첨부했지만 정작 업무차 외국인을 만나면 식은 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거리는 젊은 직원들이 부지기수다. 입사를 위한 스펙 쌓기에 치중한 결과다.

글로벌 시대에 세계적 공용어로 통하는 영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변변한 부존자원 없이 수출주도형 경제로 살아가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홍콩이나 필리핀처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때 ‘아륀지 정권’이라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그래도 이명박 정부는 영어 공교육 강화에 힘썼다. ‘한국형 토익’이라는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NEAT)을 개발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과목을 대체하는 방안까지 추진했다. 하지만 초중고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이 영어 말하기 등을 가르칠 역량이 안된다는 이유로 박근혜 정부는 집권 1년차에 곧바로 수능 대체 방안을 포기했다.

좌절된 국가 영어시험 계획

업무용도 아니고 입사시험용으로 토익을 보느라 수백억원의 로열티를 물어야 하는 현실을 바꾸려 성인용 NEAT도 추진됐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마저도 올해 폐지시켰다. 같은 보수정권임에도 전임 정권의 정책을 무조건 뒤집으려는 한국 정치의 잘못된 풍토로 400억여원의 개발비만 허공에 날렸다. NEAT에 맞춰 수십억원을 들여 관련 강좌를 개설했던 어학원들은 투자비를 날렸다. 그럼에도 어학원들은 “영어는 여전히 사교육의 영역이라는 점이 확인됐다”며 안도하고 있다고 한다.

현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수능 영어도 절대평가로 바꾸기로 했다.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실질적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한 학습이 가능해졌다”며 “교실수업 개선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경쟁 없이 영어 실력 향상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때 1만2000명에 달했던 원어민 강사는 현 정부 들어 6800명으로 줄었고 내국인 영어전담강사도 감소했다. 영어실력의 하향평준화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정태웅 사회부 차장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