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의 영역파괴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스마트폰 확산으로 모바일 시장이 확대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바일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불황이 지속되면서 소비자들의 가치소비 성향은 더 강해졌다.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해외 직접구매가 늘어나고 있고 중국인 관광객(요우커)를 필두로 한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 등 국경도 무너지고 있다. 이 같은 영역 파괴와 융합이 유통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4편에 걸쳐 알아본다. [편집자주]
경기 불황이 계속되면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쉽사리 열지 않고 있다. 가계부채와 취업난 등으로 소비 여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얇아진 호주머니에 소비심리도 꽁꽁 얼어붙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02를 기록해 4개월 연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세월호 사태 여파가 반영된 지난해 5월(105) 당시를 밑돌며 1년3개월 만의 최저치로 떨어졌다.
소비자심리지수는 기준금리 인하 등 정부의 경기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초 수준(109)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찍은 120을 회복하기는 요원해보인다.
이 같이 소비심리와 여력이 궁해지면서 소비시장도 악영향을 받고 있다. 관련 업계에서는 올해도 전체 소비시장의 저성장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가치소비' 현상 심화…불황 속 소비 욕구 해소
불경기 속 저렴한 상품을 찾는 '알뜰 소비'를 거쳐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제품에 대해 과감히 투자하는 가치 소비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가치소비는 남을 의식하는 과시 소비와는 달리 자기만족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키덜트 족이 대표적이다.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사진), 가수 이승환, 배우 박해진과 이시영은 연예계의 대표적인 피규어 마니아다.
사장실에서 얘기하고 있는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사진: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 방송 캡쳐)
양현석 대표는 YG엔터테인먼트 사옥 사장실을 아트토이와 피규어로 꾸몄다. '태권V' 거대 피규어와 함께 한쪽 벽면 전면을 피규어 진열장에 내줬다. 양 대표는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으로 태권V와 캔디를 꼽기도 했다.
이승환은 자택 거실을 피규어로 가득 채웠다. 창문가 진열대에는 아톰과 슈퍼맨 등 피규어가 빽빽이 늘어섰다. 피규어 전용 진열대를 세웠을 뿐 아니라 벽에는 이동기 작가가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아토마우스' 그림이 걸려있다.
연예계 스타뿐 아니라 일반인 층에서도 과거 '어린이 장난감'으로 치부되던 제품을 모으는 인구가 늘고 있다. 아이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들인 '키덜트'족이 늘어나면서 관련 산업 시장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맥도날드가 해피밀 세트에 슈퍼마리오 피규어를 제공하면서 한때 '마리오 대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각 매장에 길게 줄을 늘어서는 등 수요가 치솟자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선 판매와 교환 글이 잇따랐다. 피규어에 프리미엄을 붙여 개당 1만원에 파는 사례도 있었다. 햄버거를 짝지은 해피밀 세트 가격이 3500원임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의 프리미엄이 붙은 것이다.
이 같이 무서운 '키덜트족 파워'에 힘입어 국내 완구 시장 규모는 매년 20% 이상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업계에선 추정했다.
키덜트의 발길을 끌기 위한 문화 마케팅도 등장했다. 신세계는 지난달 본점 문화홀에서 곰 인형 모양의 장난감인 '베어브릭' 전시를 개최했다. 상품가치 7억원 상당의 국내 최대 규모로 조성, 키덜트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해당 전시에선 글로벌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협업)으로 출시된 브랜드 베어브릭 등을 포함해 총 1500여 종의 베어브릭을 선보였다.
◆ '이중인격' 소비자…생필품은 저렴하게 원하는 것은 아낌없이
가치 소비의 극단적인 성향으로 '소비의 이중인격화'도 나타나고 있다. 필요치 않는 제품에는 돈을 아끼고, 원하는 아이템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는 경향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 김소윤 씨(32)는 옷은 주로 저렴한 제조·직매형(SPA) 브랜드를 이용하지만 디저트는 고급 브랜드 제품을 고집한다. 김 씨는 "'빵투어'가 취미인데 최근 백화점 매장에 새로 들어온 해외 브랜드 제품들을 사먹는 데 재미를 붙였다"며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국내에서 제품을 맛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비싼 가격도 망설이지 않고 지불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 씨가 최근 애용하는 곳은 프랑스 제과브랜드인 피에르 에르메. 이 곳의 마카롱 한 개 가격은 4000원으로 시판되는 양산형 마카롱 가격의 2~3배에 달한다. 그러나 이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에르네 마카롱의 인기는 상상초월이다. 국내 첫 매장인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은 개점 첫날에만 4000만원의 매출을 거뒀을 정도다.
피에르 에르메 뿐 아니라 몽슈슈, 이성당 등 이름난 디저트 매장 앞의 대기 행렬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각 백화점들은 이같은 경향에 맞춰 다양한 유명 제과 브랜드들을 영입하며 디저트 부문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해 6월 현대백화점 제니베이커리 팝업 매장 운영 첫 날 풍경.(사진:현대백화점 제공)
이 같이 해당 제품 카테고리에서 사치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가격대는 소비자가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과하지 않은 제품을 소비하는 '작은 사치' 흐름은 음식 뿐 아니라 다양한 업계로 확산되고 있다.
소비자들이 경제적인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소비 욕구를 풀고자 하는 방편으로 이 같은 대안이 대두됐다는 분석이다.
황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비로 존재를 증명하는 현대인에게 소비 행위는 끊임없이 이뤄진다"며 "경제적 제약으로 과거와 같이 집 구매 등과 같은 큰 소비에서 행복감을 얻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요즘, '작은 사치' 경향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