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ETN, 투자의 새 지평을 열며
요즘 증권업계는 얼어붙은 업황과 불투명한 경제 전망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맞닥뜨린 수험생 같은 처지다. 고객의 자산을 책임지는 증권사에 근무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성적표를 고객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어왔다. 고객들이 금융시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심정도 증권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안심하고 자산을 맡겨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고객과 증권사는 공동의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험을 현명하게 치르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문득 올여름 감상한 영화 ‘명량’을 떠올렸다. 영화에서 충무공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앞두고 무거운 침묵으로 운명을 직시한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스스로를 다잡고, 부하들에겐 병법의 원칙인 ‘필사즉생(必死卽生)’을 일깨운다. 물길에 익숙한 촌로(村老)가 안내한 울돌목에 운명을 걸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방법대로 온몸으로 부딪혀 승리를 쟁취해낸다.

이 기적적인 승리는 투자에 대한 우화(寓話)로 읽힌다. 공포와 탐욕을 극복하고, 올바른 투자 원칙을 세우고, 좋은 금융상품을 선택하는 것이 투자의 성공 방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이 투자법을 실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증권회사에서 재직하면서 항상 갈증을 느낀 부분이 바로 ‘좋은 금융상품’에 대한 것이었다. 공포와 탐욕, 투자의 원칙, 방법 등은 투자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생의 화두(話頭) 같은 것들이다. 증권회사가 고객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영역이다. 하지만 금융상품을 발굴해 고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발전할 여지가 크다.

증권산업에서 금융상품의 중요성은 절대적인데, 과거 고객의 선택을 받아온 금융상품의 면면을 보면 천편일률적이거나 시기영합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그런 자성에서 이번에 한국거래소가 개장한 상장지수증권(ETN) 시장은 소중한 기회의 장으로 보인다.

ETN은 기존의 주식연계증권(ELS), 파생결합증권(DLS)처럼 모든 운용의 책임이 증권사에 주어지기에 기존의 금융상품과는 차이가 있다. 즉, 금융상품 유통에 주력하던 기존 증권사가 고객의 수요에 맞는 상품을 스스로 제작해 적시에 공급할 수 있는 증권사로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또 ETN 시장은 기존 금융상품에 부족했던 투자 자산과 전략의 다양성을 제공할 여지가 크다는 믿음이다. 투자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투자의 기준을 제공하는 도구로 ETN이 사용될 수만 있다면 ETN 시장은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박하게 출발하는 ETN 시장이지만 투자자와 업계 모두 큰 결실을 보기를 바란다.

김원규 < 우리투자증권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