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17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필립스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세계 휴대폰 시장을 두고 각축을 벌이던 노키아와 에릭슨의 운명을 갈랐다. 이날 필립스 공장에 낙뢰가 떨어지며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10분 만에 진화됐지만 연기와 그을음으로 인해 생산라인 4개 중 2개의 기능이 마비됐다. 공장 생산 물량의 40%를 납품받을 예정이던 노키아와 에릭슨은 당장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두 회사의 모습은 크게 차이 났다.

바로 위기대응팀을 구성한 노키아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대체 부품을 물색했고 필립스 측에는 다른 지역 제조라인을 동원해 부품을 생산할 것을 요구하며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에릭슨은 곧 복구될 것이라는 막연한 설명만 믿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고 결국 한 달 만에 휴대폰 생산을 중단하게 됐다. 에릭슨의 2010년 세계 시장 점유율은 전년 대비 3%포인트 줄어든 9%로 곤두박질쳤고, 노키아는 3%포인트 늘어난 30%를 달성했다. 에릭슨이 그해 입은 손실만 23억4000만달러였다. 전문가들이 두 회사의 경험을 업무연속성관리(BCM) 체계를 구축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이유다.

지진과 홍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부터 전쟁과 테러, 전염병에 이르는 각종 사건·사고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기업들 앞에는 예측할 수 없는 위기들이 도사리고 있다. 2001년 미국 9·11 테러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 거대한 위기를 겪은 기업들이 앞다퉈 BCM을 도입하는 것도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업이라는 시장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다. 국내 기업들도 지난달 두산이 BCM 체계를 마련해 대규모 훈련에 나서고 한화생명이 지난 8월 영국 표준협회(BSI)로부터 BCM 국제인증을 받는 등 본격적인 재난대비 경영에 나서고 있다.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BCM 경영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진과 해일에 이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일본 기업은 생산거점의 파괴, 전력 부족 장기화와 계획정전, 소비심리 위축 등 전방위적 위기에 직면했다. 2011년 기준 대기업의 45.8%가 BCM을 도입했을 정도로 평소 위기 관리에 철저한 일본이었지만 사고 후 한동안 도요타자동차가 부품을 마련하지 못해 동북지방의 공장과 조립 자회사의 조업을 정지시켰을 정도로 여파가 컸다.

하지만 통신·전자회사인 NEC는 지진 발생 9분 만에 최고책임경영자를 본부장으로 한 ‘중앙영업연속성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피해 확인과 복구에 나서 2주 만에 모든 조업을 정상화하는 등 발빠른 대응을 보였다. 위기 상황에서도 영업을 계속하기 위해 평소 위험 요소들을 파악하고 각 상황에 맞는 경영활동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NEC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협력업체에 ‘공급망 영업연속성계획 가이드라인’을 제공했다. 중소기업이 독자적인 BCM 체계를 구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매출의 50%를 NEC 납품을 통해 얻는 협력업체는 BCM 체계 수립 때부터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884명이 사망하고 45억7000만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 2011년 태국 대홍수도 기업들에 BCM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홍수로 인해 태국 자동차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던 일본 자동차 업계는 도요타자동차의 순이익이 전년의 56.1%로 급감하고 닛산은 전년보다 생산량이 13.5% 줄어드는 손실을 입었다.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생산의 60%를 차지하던 태국의 홍수로 인해 세계 전자부품업체들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07년 들어서야 ‘재해경감을 위한 기업의 자율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재난대비 경영을 준비해온 한국에서 일본 태국과 같은 대규모 자연재해가 터졌을 경우 그 피해는 더 커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제대로된 BCM 체계를 마련하지 못한 중소기업의 경우 위기에 더 취약하다. 2002~2011년까지 10년 동안 자연재해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은 1만3000여곳으로 피해 규모만 1조4000억원에 달할 정도다.

2012년 9월 발생한 경북 구미의 불산 누출사고는 기업의 피해가 기업 자체는 물론 해당 지역사회 전체로까지 퍼져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동탱크에 실린 불산을 공장 탱크로 옮기는 과정에서 밸브를 잠그는 것을 잊는 직원의 사소한 실수로 불산이 누출돼 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국내 기업 가운데는 삼성SDI가 체계적인 위기관리 체계를 갖춘 기업으로 꼽힌다. 2009년 8월 국내 제조기업으로는 최초로 영국 BSI로부터 BCM 인증을 받은 삼성SDI는 전지업계 내 경쟁사들이 화재를 비롯한 각종 돌발 사태로 경쟁력을 상실하는 것을 지켜보며 BCM 구축의 필요성을 느꼈다. 2008년 주요 부서 임직원 100여명으로 이뤄진 대규모 태스크포스(TF)를 꾸린 삼성SDI는 원자재 구매부터 제품 제조, 판매 및 서비스까지 업무 공정 전체를 분석해 업무 간의 연관성과 우선순위를 확인했다. 이를 통해 발생 가능한 60여가지의 위기상황을 상정하고 △건물과 시설의 파괴 △품질 문제로 인한 리콜 사태 △원부자재 수급 문제 등 세 가지 주요 위협 요소를 꼽은 삼성SDI는 사고대응 및 사업재가와 관련한 모의훈련을 통해 BCM을 수시로 운영하고 있다. 그 결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 예상 피해 파악 및 이후 대응책 마련까지 24시간 안에 처리하는 등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