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한국 경제 新4低 근원…'돈이 늙고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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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 현금 적정선 이상 보유
'충격요법' 써서라도 돈을 돌려야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충격요법' 써서라도 돈을 돌려야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한국 경제 新4低 근원…'돈이 늙고 썩는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411/02.6912457.1.jpg)
특정 국가에서 돈이 늙고 썩는 정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경제활력 지표로 통화유통 속도와 통화승수가 있다. 통화유통 속도는 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이 지표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조로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돈의 흐름이 얼마나 정체돼 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통화승수다. 돈의 총량을 의미하는 통화량을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로 나눠 산출한다. 이 지표는 국민의 현금보유 성향과 예금은행에 대한 지급준비율 등에 의해 결정되는데, 현금보유 성향과 지급준비율이 작을수록 통화승수는 커진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한국 경제 新4低 근원…'돈이 늙고 썩는다'](https://img.hankyung.com/photo/201411/01.9242512.1.jpg)
돈이 늙고 썩는 가장 큰 원인은 한국 기업이 지나치게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기업의 현금보유는 459조원에 달해 국내총생산(GDP)의 34%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미국의 11% 대비 3배, 독일의 20%에 비해서는 1.7배 높은 수준이다. 한국 기업이 보유한 현금만 풀어도 GDP가 2%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 기업이 현금을 쌓아 놓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가장 큰 요인은 미래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야성적 충동’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 기업의 자본투자 증가율은 연평균 1%대에 불과해 실질적으로 정체돼 왔다.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직간접 자금 중개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것도 돈이 늙고 썩은 원인이다. 현금보유를 많이 한 기업이 자체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필요한 기업에라도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금융회사의 이기주의와 금리체계 약화 등으로 실물과 금융 간 연계성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는 시장 기능에 의한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기대할 수 없다.
일부 개인들이 돈을 아예 시장에서 퇴장시키고 있는 것은 더 우려되는 일이다. 저금리와 금융상품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는데다 각종 불안심리까지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지하자금 규모도 커져 2012년 1분기 71.6%까지 상승했던 5만원권 회수율이 올해 3분기에는 10%대로, 신권이 발행되면 거의 돌아오지 않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한국 기업과 개인이 투자와 소비에 너무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도로가 겁 많은 운전자로 가득차면 더 위험해지고, 아이를 키울 때 세균에 너무 민감해지면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대기업과 부유층의 돈이 돌지 않으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까지 겹쳐 중소기업과 서민층은 더 어려워진다.
현 시점에서 기업과 개인에 맡겨 놓으면 돈이 돌기가 쉽지 않다. 충격요법을 써서라도 인위적으로 돌려야 한다. 2기 경제팀은 기업이 보유한 현금을 임금과 배당 인상을 통해 개인에게 흐를 수 있도록 했다.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면 투자하라는 얘기다. 개인이 보유한 현금은 정부가 대신 돌려주겠다는 취지에서 부유세 도입안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경제에 산소를 공급해 주는 혈액인 돈이 돌지 않고 늙으면 그 나라 경제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미 한국 경제는 저투자·저성장·저물가·저금리 등 이른바 ‘신4저(新4低)’ 현상이 정착되는 추세가 뚜렷하다. 대외적으로는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후발국에 추격을 당하는 ‘너트 크래커 형국’에 직면한 지 오래됐다.
한국 경제처럼 돈이 늙고 썩을 때는 경기침체 등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경기순환상의 처방만으로 한계가 있다. 늙고 썩어가는 돈부터 돌려 젊게 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정책 신호에 대한 국민의 반응도를 끌어올리고, 그 위에 과감한 재정과 통화정책을 추진해야 경기순환적인 단기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국가의 성장 동인을 감안해 거시경제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그 틀 안에서 강력한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병목현상을 줄여 경제주체 간에 돈이 잘 돌게 하고, 경제연령을 젊게 해야 한국 경제가 ‘퀀텀 점프’할 수 있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