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위기 이후 많은 조치가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지역의 은행 중 72%가 아직 정상적인 대출을 할 정도의 상황으로 복원되지 못했다. 양적 완화 조치를 통해 강의 상류에서 물을 엄청나게 내려 보내는데 물은 댐에 막힌 채 잔뜩 고여 있기만 할 뿐 흐르지 못하는 형국이다. 일단 풀린 돈 덕분에 금융기관에 자금이 공급됐고 금융기관들은 위기를 넘기고 정상화되는 중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1단계다. 이제 돈이 실물 부문으로 흘러들어가 실물 부문이 활성화되는 2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이 2단계가 잘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 중 일부는 펀드부문이나 시장부문으로 가 금융분야의 과잉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실물부문은 위기를 맞아 위축된 심리로 인해 위험에 대한 과도한 회피성향이 나타나면서 투자가 부진하다. 금융분야에서는 지나친 위험추구로 과잉이 나타나고 있고, 실물분야에서는 지나친 위험회피로 위축이 일어나는 ‘새로운 글로벌 불균형’이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2015년을 두 달여 남겨 놓은 상황에서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돈이 금융분야에서만 맴돌 뿐 실물부문으로 시원하게 흘러가지 못하는 점은 우리도 비슷하다. 믿었던 삼성과 현대를 포함한 주력산업 전반의 부진함까지 우리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면서 실물분야에서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이는 수치로 드러난다. 투자와 수출이 좋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분기 설비투자는 전분기 대비 0.8% 감소했고 수출은 전분기 대비 2.6% 줄었다.

해외 여건까지 매우 부정적이다. 미국의 경제회복 기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양적 완화 종료와 함께 통화정책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금리가 상승하면서 해외자본 이탈이 본격화할 경우 우리 경제에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위기국들에 긴축을 요구하며 스스로 재정긴축기조를 유지하다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이다. 독일이 중심이 돼 어려워진 남유럽 재정위기국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했는데 거꾸로 독일이 남유럽 국가로 인해 끌려 내려가는 상황이다. 통화정책이 완화적이라도 재정정책이 긴축적으로 가면 그 효과는 거의 없어진다는 점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성장은 자꾸 정체되고 있고 2020년엔 3%대까지 주저앉는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일본의 아베노믹스도 소비세 인상의 부정적 영향과 세 번째 화살의 부진함으로 기대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 오고 있다. 이로 인한 엔저(低)의 부정적 영향은 우리 경제에 폭풍우를 몰고 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작년 이맘때 미국, 유럽, 중국, 일본의 회복세와 정책적 이니셔티브는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긍정적 요소로 평가됐는데 1년여 만에 이들 모든 국가의 상황이 위험요인으로 전환돼 버렸다.

해외 상황과 국내 상황이 한꺼번에 나빠지면 우리 경제에도 부담이 온다. 큰 것이 오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과제는 분명하다. 돈이 돌게 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민간과 정부의 크고 작은 투자계획이 잘 집행되도록 해야 한다. 규제만 풀리면 즉시 집행될 수 있는 투자과제들을 중심으로 신속한 규제 완화를 통해 돈이 돌도록 다양한 선행적 조치가 필요하다.

기획재정부 홈페이지에는 ‘국회 통과가 시급한 30개 법안,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됩니다’라는 호소문 수준의 배너가 있다. 클릭해보면 통과를 기다리는 30개 법안의 내용이 잘 설명돼 있다. 이들 대부분이 돈이 돌도록 하는 조치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법안들이다. 정부가 일 좀 하겠다는데, 돈 좀 돌게 해서 경제 좀 살리겠다는데 국회가 왜 이리 발목을 잡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다 못해 훼손시키는 수준으로 가는 현 상황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우리 국회는 어느 나라 국회인가.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안전벨트를 매는 심정으로 모든 주체가 경제 살리기를 위해 화합과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시점이다.

윤창현 < 한국금융연구원장 chyun3344@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