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군 총정치국장 황병서 일행이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맞춰 지난 주말 전광석화처럼 인천을 다녀갔다. 그는 바로 열흘 전에 국방위 부위원장까지 겸하게 된 김정은 체제의 2인자다. 함께 온 당비서 최용해도 실세 중 실세이고, 당 통일전선부장 김양건 역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핵심인사다. 그들은 12시간 만에 대통령 빼고 우리 쪽 주요인사들을 거의 다 만나다시피 하고 돌아갔다.

북의 최고위급들이 불쑥 인천을 찾아온 까닭은 무엇인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해가며 내리 사흘간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어왔던 북이었다. 더구나 김정은의 모습이 근 한 달째 보이지 않는 와중에 하루 전날 불쑥 일방적으로 통보한 방문이었다.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왔다”는 북쪽의 말에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다. 북은 지금까지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폭격 도발에 대해 문책이나 사과도 없었다.

북한은 미국과 직접대화를 꾀하는 소위 통미봉남(通美封南)책이 막힐 때이거나 스스로에게 꼭 무언가의 자원이 필요할 때면 대화의 문을 두드려왔다. 특히 올 들어서는 일본과 관계개선에 나섰지만 이렇다 할 진도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의 전격적인 유화제스처다.

북의 유화적인 자세를 굳이 나무랄 까닭은 없다.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부터 핵폐기까지 모두가 실질적인 협의여야 한다. 밀실회담도 더는 인정할 수 없다. 고위급회담은 더더욱 일정과 의제를 드러내놓고 국민적 지지 속에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확고한 원칙의 정립이다. 북한 정권은 권력의 재생산 가능성조차 없는 퇴행적 권력이다. 우리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을 한국의 약세라고 생각하는 원초적 권력집단일 뿐이다. 북이 지금 대화에 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박근혜 정부가 원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북한의 소위 최고 실세가 인민군복 차림으로 활갯짓하는 것을 편치 않게 바라봤을 국민들도 많다. 그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