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해서 발견한 게 그 유명한 ‘침묵의 나선(the spiral of silence)’ 이론이다. 자신의 견해가 우세 여론과 일치하면 적극 표출하고, 그렇지 않으면 침묵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렇게 형성된 여론이 소용돌이처럼 한 방향으로 쏠리는 건 당연하다. 다수 의견은 나선의 바깥쪽으로 돌면서 세가 커지고 그렇지 않은 의견은 안쪽의 작은 나선으로 돌며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노이만은 여론의 개념을 ‘양식 있고 책임 있는 시민의 판단’보다 ‘따라야 할 모종의 압력’으로 파악했다. 1744년에 여론이라는 말을 처음 쓴 장 자크 루소와 그 이전의 로크, 흄도 생각했던 이른바 ‘사회적 통제’의 결과다. 왜 그럴까. 그는 침묵의 이유를 고립의 두려움, 동조성(conformity), 타인의 판단 능력에 대한 의심 등 세 가지로 꼽는다. 고립의 두려움이나 승자와의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동조성은 금방 수긍이 간다. 선거 후엔 너도나도 승자에게 투표했다고들 너스레를 떤다. 그런데 남의 판단 능력을 의심한다는 건 뭔가. 다수가 공유하는 생각인데도 모두 말하기 꺼려하는 바람에 실제와 반대되는 쪽으로 끌려가는 현상이라고 한다. 낙태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많아 찬성론자들은 소수 집단으로 밀렸지만 실제 조사에서 정반대 결과가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밴드왜건 효과’와 비슷하다. 서커스 행렬 맨 앞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악대차(車)가 편승효과를 부추기면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 미국 경영학자 제리 하비는 이를 ‘애벌린 패러독스’로도 부른다. 외식하러 가자는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온 가족이 폭염 속에서 애벌린까지 고난의 행군을 했던 일화에서 딴 말이다.
‘침묵의 나선’ 이론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에서도 적용된다는 조사 결과가 미국에서 나왔다. 목소리 큰 게 전체 여론인 양 둔갑하는 건 미국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물론 눈치 구단에 냄비 근성까지 갖춘 한국 사회의 유별난 쏠림 현상에 비하면 아직은 얌전한 수준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