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아지트
흔히 비밀 은신처의 뜻으로 쓰이는 아지트(agit)는 agitation point의 준말이다. agitation은 불안, 동요 혹은 소요나 시위 따위를 뜻하니 아지트는 소요나 시위를 위한 장소쯤 되는 셈이다. 러시아어 아지트풍크트(agitpunkt)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좌익운동 과정에서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항상 이동하며 소재를 모르게 하고 비밀지령을 내리는 지하운동의 집합소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직역하면 선동본부라는 말인데 이후 비밀본부 지하본부와 같은 뜻으로 두루 쓰이게 됐다는 게 통설이다.

아지트와 비슷한 말로 은신처, 비밀기지, 피난처, 소굴 등 다양한 단어가 있다. 모두 비슷한 뜻으로 혼용되고 있지만 단순히 숨는 장소를 넘어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 단어로는 아마도 아지트만 한 표현이 없지 않을까 싶다. 6·25 당시 지리산 빨치산들이 은신처로 활용했던 비트는 ‘비밀 아지트’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아지트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전쟁 등 혼란기나 독재정권 하에서다. 적 또는 독재자에게 들킬 경우 자칫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니 저항군이나 반체제 세력들은 자연스레 비밀스런 장소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2차대전 중 나치 치하 네덜란드에서 2년간 숨어지낸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 ‘안네의 일기’도 그런 아지트에서 탄생했다. 책장 뒤 비밀의 방과 다락방이 일기의 배경이자 일기를 작성한 장소였다. 빨치산이 비트에 숨어들어 저항을 벌인 것도 6·25전쟁 때였다. 저항세력들의 각종 아지트가 영화의 단골 소재인 것도 그런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숨고 쫓는 과정만큼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장면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법망을 피하려는 범죄자들도 종종 아지트로 숨어든다. 하지만 그 결말은 대부분 비극적이다. 특히 범죄자가 일국의 통치자였거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일수록 더욱 그렇다. 2003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수염 덥수룩한 얼굴로 지하 은신처에서 체포되는 장면은 권력무상을 실감케 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지난 5월 검찰의 순천 별장 수색 당시 통나무 벽 사이에 숨어 검찰을 따돌렸다고 한다. 당시엔 쾌재를 불렀을지 모르지만 그는 결국 허망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세상을 구원할 듯, 구원파를 이끌던 인물이 한낱 일신의 안녕을 위해 2시간여를 은신처에 쪼그리고 있었다. 그를 추종하던 이들이야말로 어디 은신처에라도 숨어들어가고 싶은 심정 아닐까.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