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화(왼쪽)·경화 자매가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 로마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동생 명훈씨(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와 함께 ‘정 트리오’로 활약할 때 촬영한 것이다. 평생 7남매의 교육과 뒷바라지를 책임진 어머니 이원숙 여사(가족사진 왼쪽 세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이 여사는 자식들의 스승이자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정명화(왼쪽)·경화 자매가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 로마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동생 명훈씨(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와 함께 ‘정 트리오’로 활약할 때 촬영한 것이다. 평생 7남매의 교육과 뒷바라지를 책임진 어머니 이원숙 여사(가족사진 왼쪽 세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이 여사는 자식들의 스승이자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첼리스트 정명화 씨(70)의 서울 구기동 자택에 있는 연습실. 입구에 들어서자 벽면에 사진 한 장이 보인다. 정명화 씨가 동생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6),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지휘자 정명훈(61), 그리고 어머니 이원숙 여사(2011년 작고)와 함께 웃는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다. 1980년대 초 ‘정 트리오’ 유럽 투어 당시 이탈리아 로마의 한 호텔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옆에 두고 정명화, 정경화 자매가 마주 앉았다. 60년도 훨씬 지난 어린 시절 이야기가 어제 일인 양 쏟아져 나왔다. 기억력이 좋은 동생 정경화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6·25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피란갔을 때니까 제가 두 돌이 좀 지났을 거예요. 그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어머니가 저를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시키셨어요. 노래하라고 하니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몇 곡 했죠. 스튜디오 유리창 밖에서 언니가 가사 틀리지 말라고 입 모양으로 노래를 계속 불러줬던 일이 기억나네요. 어머니는 제가 했던 모든 공연 중 이때 가장 조마조마했다고 했어요. 꼬맹이가 싫다고 노래를 안 하면 어떡할까 크게 걱정했답니다.”

명화·경화는 7남매 가운데 셋째, 넷째다. 남매 중 음악인이 된 사람은 플루트 연주자로 활동한 맏딸 정명소 씨(2007년 작고)까지 4명이지만 현악기를 택한 사람은 둘뿐이었다. 명소씨가 먼저 1959년 미국 줄리아드 음대로 유학을 떠났고, 명화·경화 두 자매는 1961년 뒤따랐다. 두 자매는 뉴욕에서 4년 넘게 함께 살았다. 지금도 둘은 서울 구기동에 있는 같은 빌라 단지에 살고 있다.

‘정 트리오’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 이원숙 여사다. 이 여사는 6·25전쟁 때 트럭을 구해 피아노를 싣고 피란갔을 정도로 자식 교육에 신경을 썼다. 미국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면서 유학온 자식들을 세계적 음악가로 키워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자매의 대화] "명화 언니 첼로 재능 찾아준 건 아버지였죠…바로 악기 사고 선생님 구한 어머니도 대단"
“어머니는 당시로선 드물게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셨어요.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셨는데 찬송가를 부르면서 항상 피아노 반주를 하셨죠. 음악 교육이 자식들 정서에 좋다고 생각해 피아노를 배우게 하셨어요.”(정명화)

이 여사는 한 번도 자식들에게 음악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정 트리오 이외 다른 남매들은 의사, 사업가,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뒷바라지는 어머니 몫이었지만 7남매의 진로 결정에는 아버지 정준채 씨(1980년 작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식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어머니는 열 명이 넘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요. 그런 다음에 아버지와 다시 의논하시죠. 어머니는 아버지의 판단이 틀린 적이 없다며 항상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정경화)

두 자매가 서로 다른 악기를 택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두 자매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둘의 연주를 보고는 “명화는 안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분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단호하게 ‘안 되겠다’고 말하는 아버지도,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첼로를 사고 선생님까지 구한 어머니도 말이죠. 첼로를 시작하자마자 언니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고요.”(정경화)

“바이올린은 연주 자세가 불편했는데 첼로는 잡자마자 편안했어요. 저나 동생이나 부모님이 없었다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을까요.”(정명화)

부모님은 자매에게 최고의 청중이기도 했다.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이 친구들이 연주할 때 부모들은 떨어서 나타나지도 않아요. 뒤에서 숨어 기도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우리 부모님은 저희 공연에 와서 음악 듣는 걸 그렇게 좋아하셨어요.”(정경화)

이 여사는 자식들 매니저 일도 맡았다.

“1960년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공연을 했어요. 어머니는 문이 삐걱거리면 직접 기름칠을 하셨죠. 공연 중에 기차가 지나간다고 하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역장에게 연락도 하셨어요. 객석에 빈자리가 있으면 경비하시는 분들에게 자리를 채워 달라고 부탁도 하셨죠. 고단할 법도 한데 객석에 앉아 저희 연주를 들으며 ‘다음 공연은 언제더라’ 생각하셨어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열심히 연주한 건 당연한 일이죠.”(정경화)

자매 모두 연주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가족을 꼽았다. 스무 살도 되지 않아 유학을 떠났지만 부모

과 형제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잘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큰언니까지 셋이 뉴욕에 살 때였어요. 언니들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침대 위에 언니들이 옷을 쌓아두면 내가 쫑알쫑알 짜증내면서 언니들을 야단쳤어요.”(정경화)

“그때 동생한테 구박을 하도 받아서 그런지,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정리부터 해요.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웃음)”(정명화)

가끔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유학길에 올랐다가 청소년기를 잘못 보낸 연주자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두 자매는 “한국에서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공부한 다음 유학을 떠나는 것이 더 낫다”고 조언했다.

이들이 2011년부터 대관령 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을 함께 맡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 음악제는 다른 음악제처럼 수많은 연주자가 다양한 공연을 펼친다. 그러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학생들의 교육이다. 지난 10년 동안 19개국 1400여명의 학생이 대관령 국제음악제의 음악학교를 거쳐갔다. 학생으로 참여했던 차세대 바이올리스트 클라라 주미 강은 올해 교수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어릴 때부터 실전 연주회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명화·경화 자매의 생각은 같았다.

“처음 유학갔을 때 외국 학생들 실력이 대단했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한국에서 독주회, 협연 등 다양한 공연 기회를 만들어주신 덕에 연주 경험은 저희가 더 많았어요. 실제 공연에서 연주한 곡은 굉장히 잘했죠. 그걸로 살아남았어요.”(정명화)

“한국예술종합학교나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등에서 연주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지만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들입다’ 연주를 시켜야 해요.”(정경화)

각종 콩쿠르가 학생들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언니는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과제곡을 음악적·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경화가 레벤트리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연주 제의를 많이 받았듯 콩쿠르를 통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현실론을 내세웠다.

반면 동생은 “콩쿠르는 자연스럽게 연주하면서 개성을 키울 기회를 빼앗는다”며 “탈락할 경우 겪게 될 슬럼프도 무시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언니는 다시 “물론 콩쿠르에서 반짝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고 예술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불가피하게 콩쿠르를 내보낼 때도 있지만 우승하더라도 이제 시작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생도 “선생님(‘명조련사’로 손꼽히는 바이올리니스트 이반 갈라미언)은 내가 콩쿠르에서 잘하면 ‘네 실력이 생각만큼 뛰어난 것이 아니다’고, 못하면 ‘네 생각만큼 못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며 “학생들에게 콩쿠르 결과와 관계없이 계속 열심히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심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둘은 젊은 연주자를 키우는 데 앞으로의 인생을 다하겠다고 뜻을 모았다.

“2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20년 전보다 지금 더 잘 가르치는 것 같아요. 그동안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죠. 대관령 국제음악제를 세계적 음악제로 만드는 것도 중요한 목표입니다.”(정명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쉽지는 않았어요. 피눈물 날 때도 있었고요. 예술은 끝이 없는 사슬에 보석을 하나씩 엮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어온 사슬을 후배들이 계속 이어가야죠. 대관령 국제음악제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성장했으면 합니다.”(정경화)

24일 강원 평창 알펜시아에서 제11회 대관령 국제음악제 ‘저명 연주가 시리즈’가 막을 올린다. 이날은 세월호 참사 발생 10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두 자매는 개막 공연에 앞서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 세월호 수습 과정에서 숨진 이들을 위한 추모곡으로 러시아 작곡가 안톤 아렌스키의 피아노 삼중주 ‘비애’를 피아니스트 케빈 커너와 함께 연주한다. 아렌스키가 친구인 첼리스트 칼 다비도프의 죽음을 애도하며 만든 작품이다. “대한민국 국민 그 누구도 그날의 비애를 잊지 않았다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연주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