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팬택, 채권단이 책임져라
자본잠식에 누적 적자로 기로에 서 있는 팬택 문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팬택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 임직원들이 ‘팬택이 살아야 우리도 산다’며 지난주 달려간 곳은 청와대와 국회였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중인 이 회사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채권은행 앞이 아니었다. 협력업체 대표들은 “팬택이 회생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적극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팬택 처리 정치화 조짐

시장에서 제품이 안 팔려 경영난을 겪는 민간 기업을 청와대와 국회 보고 살려 달라는 건 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정상의 단초를 제공한 건 채권은행들이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3000억원을 출자전환해 팬택을 정상화시키겠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단 전제조건을 달았다. 팬택에 상거래 채권을 갖고 있는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도 출자전환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 통신사들이 팬택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상거래 채권인 판매장려금 1800억원을 주식으로 전환하라는 요구다. 팬택이 더 적자를 내지 않도록 월 15만대 이상의 휴대폰을 꼭 사달라는 조건도 달았다.

통신 3사는 난색을 표했다. 채권은행들은 결정 시한을 계속 연장하며 통신 3사를 압박 중이다. 어느 새 팬택의 생명줄은 채권단이 아닌 통신 3사가 쥐고 있는 꼴이 됐다. 협력사들이 청와대와 국회를 찾아간 것도 통신사들이 채권단 요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행사해달라는 뜻이었다.

채권단이 팬택 정상화의 책임 일부를 통신사에 돌리는 건 정당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정당하지 않다. 워크아웃 제도에서 상거래 채권은 출자전환 의무가 없다. 이자수익을 기대한 대신 리스크도 감수해야 하는 금융채권과는 성격이 달라서다. 팬택 회생에 통신사도 책임이 있다는 건 ‘기업이 장사가 안되는 건 소비자가 제품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니 소비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과 다를 게 없다. 시장 수요와 관계없이 팬택 휴대폰을 일정량 계속 사달라는 요구도 어불성설이다. 통신 3사 창고엔 이미 팔리지 않은 팬택 휴대폰이 60만대나 쌓여 있다.

통신 3사가 채권단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면 배임 문제도 생긴다. 통신 3사는 모두 상장사다. 그런 결정으로 주가가 떨어져 주주들이 손해를 본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채권은행들이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온 데는 채권단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채권단도 팬택 정상화를 포기하고 싶은데, 핑계거리를 찾고 있다’는 얘기다.

통신사에 책임 전가 말 안돼

통신사들이 출자전환을 하고, 휴대폰도 계속 사준다면 팬택의 회생에 큰 도움이 되긴 할 거다. 그러나 그건 통신사의 경영 판단에 맡길 일이다. 채권단이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 청와대와 국회가 ‘하라 마라’ 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팬택의 정상화 방안은 채권단이 책임져야 한다. 채권단은 이미 팬택 지분 37.8%를 가진 최대 주주이기도 하다.

시간은 팬택 편이 아니다. 채권단이 통신 3사를 물고 들어와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사이 휴대폰 매장에선 팬택 제품이 더 안 팔리고 있다. 생사가 불투명한 회사 제품을 누가 사겠는가.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채권단은 책임 있는 결단을 해야 한다. 애먼 제3자를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차병석 IT과학부장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