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사라졌나…입주 예정자들이 낸 아파트 부가세 1조3000억
국세청이 부동산 분양시장에서 1조3000억원이 넘는 부가가치세가 증발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시공사 등을 상대로 대대적인 징수에 나섰다. 정부가 숨은 세원 파악에 나선 이래 특정 분야에서 조 단위의 체납 사실이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12일 한국경제신문이 단독 입수한 국세청 내부 문서에 따르면 국세청은 전국 5006개 분양 시행사에서 1조5123억원(지난해 5월 기준)에 달하는 부가세가 체납된 사실을 파악하고 소송을 통한 징수에 착수했다. 이 중 1조3358억원(88.3%)은 시행사 부도 등 폐업을 이유로 국세청이 한 차례 결손 처리했던 돈이다. 그러나 국세청은 시공사·신탁사도 이러한 세수 증발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징수를 위해 ‘결손’이 아닌 ‘체납’으로 재분류했다. 국세청이 파악한 징수 대상 시공사·신탁사에는 L사, G사 등 대기업 건설사가 다수 포함됐다.

어디로 사라졌나…입주 예정자들이 낸 아파트 부가세 1조3000억
부가세 납세 의무를 지는 곳은 원칙적으로 시행사다. 그러나 국내 분양사업은 시공사·신탁사 명의로 분양대금 계좌를 만들고 자금을 관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행사는 영세한 곳이 많아 자금 관리를 따로 하는 게 은행 대출 등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신 시공사·신탁사는 시행사와 비용 정산 약정을 맺는다. 이 약정에 따라 시공사·신탁사는 시행사의 부가세를 우선 정산해야 한다.

하지만 시공사·신탁사는 시행사가 폐업 처리될 걸 알면서도 공사대금 등 이익금만 챙기고 부가세는 내지 않았다는 게 국세청의 지적이다. 국세청은 이렇게 사라진 부가세가 1조335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조세 전문가는 “시행사는 부가세를 정산하라고 시공사 등에 요구할 권리(채권)가 있지만 미납 세금의 일부를 나눠 가지기 위해 대부분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며 “국세청의 소송은 국세징수법과 민법에 따라 시행사의 이 권리를 대신 행사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세징수법 41조는 ‘세금 체납자(이 사례의 경우 시행사)가 채권을 갖고 있을 때 세무서장은 체납액 범위 내에서 그 권리를 대신 행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법 404조는 ‘채권자(국가)는 자기 채권 보전을 위해 채무자(시행사)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세청은 서울 상계동의 한 오피스텔 신축분양사업 신탁사였던 한국토지신탁을 상대로 소송을 내 지난달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8부(부장판사 김연하)는 서울지방국세청이 낸 압류채권 지급 청구 소송에서 “원고는 체납 부가세를 보전하기 위해 국세징수법이나 민법에 따라 시행사의 채권을 대신 행사할 수 있다”며 원고의 청구액 31억6000여만원을 전액 인정했다. 민사 소송에서 승소함에 따라 국세청은 한국토지신탁을 횡령 혐의로 형사 고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서울 방배동의 한 아파트를 시공한 D건설사에도 부가세 체납액 38억8000여만원을 청구해 다음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시공사도 건설경기 악화로 시행사로부터 못 받은 돈이 많은데 세금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건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토지신탁 관계자는 “시행사와의 계약에 따르면 시행사가 부가세를 못 냈을 때 신탁사가 대신 낼 수도 있다고 돼 있을 뿐 낼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며 “항소심에서 이를 집중 부각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병훈/배석준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