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이항로의 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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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위해 책 드는 청춘도 안쓰러워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이항로의 여식](https://img.hankyung.com/photo/201406/AA.8774164.1.jpg)
배우는 것은 훗날 그 지식을 쓰기 위해서겠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를 목적 달성을 위한 방편으로만 볼 수는 없다. 특히 배움에 대한 열망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19세기 학자 화서 이항로(1792~1868)의 딸은 사서 등 유학 경전을 웬만큼 익힌 여성이었다. 그녀는 시집을 간 뒤에도 길쌈이나 집안 살림보다 글공부에 더 열중했다. 그러자 이항로는 편지를 써서 “글을 가지고 먹고 살려는 것이냐”며 딸을 나무랐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자존도 지켜낼 수 없으니 현실에 순응하며 본분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배워봐야 써먹을 곳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던 시대였다. 그러니 글공부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 딸로 인해 사위와 사돈에게 면목이 없고, 사돈댁 식구들이 수군거리며 흉볼 것을 생각하며 당황했을 이항로의 심정도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 딸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나무람에 십분 수긍했을까. 그녀는 배워봐야 쓸 곳이 없는 글공부를 애당초 해서는 안 됐던 것일까.
지금은 누구든지 원하고 노력하는 만큼 배울 수 있는 세상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듯해도, 개인이 누리는 교육의 질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신용불량자가 돼 버리거나, 생계 때문에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너무도 많다.
사회가 요구하는 ‘학벌’을 갖추기에도 힘겨운 그들에게 젊은이다운 열정과 패기로 학문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과거 이항로의 딸은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문적 열정을 비난받았지만,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공부해야 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도 안쓰럽기는 매한가지다.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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