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이항로의 여식
청년층의 취업난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취업 준비를 위해 졸업을 늦추는 ‘졸업 유예생’이 부쩍 늘었는가 하면, 아예 학업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자 ‘공무원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가 되면서도, 생존을 위해서는 배움에도 점점 실리적이 돼가는 우리네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배우는 것은 훗날 그 지식을 쓰기 위해서겠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를 목적 달성을 위한 방편으로만 볼 수는 없다. 특히 배움에 대한 열망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19세기 학자 화서 이항로(1792~1868)의 딸은 사서 등 유학 경전을 웬만큼 익힌 여성이었다. 그녀는 시집을 간 뒤에도 길쌈이나 집안 살림보다 글공부에 더 열중했다. 그러자 이항로는 편지를 써서 “글을 가지고 먹고 살려는 것이냐”며 딸을 나무랐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자존도 지켜낼 수 없으니 현실에 순응하며 본분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배워봐야 써먹을 곳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던 시대였다. 그러니 글공부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 딸로 인해 사위와 사돈에게 면목이 없고, 사돈댁 식구들이 수군거리며 흉볼 것을 생각하며 당황했을 이항로의 심정도 짐작된다. 그렇지만 그 딸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나무람에 십분 수긍했을까. 그녀는 배워봐야 쓸 곳이 없는 글공부를 애당초 해서는 안 됐던 것일까.

지금은 누구든지 원하고 노력하는 만큼 배울 수 있는 세상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듯해도, 개인이 누리는 교육의 질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신용불량자가 돼 버리거나, 생계 때문에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너무도 많다.

사회가 요구하는 ‘학벌’을 갖추기에도 힘겨운 그들에게 젊은이다운 열정과 패기로 학문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과거 이항로의 딸은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문적 열정을 비난받았지만,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공부해야 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도 안쓰럽기는 매한가지다.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