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렘 반 해슈트의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의 갤러리를 방문하는 대공’ 1628년
빌렘 반 해슈트의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의 갤러리를 방문하는 대공’ 1628년
대공(大公)을 비롯한 왕후장상들이 예술품의 보물창고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등 고대의 조각상으로부터 티치아노, 알브레히트 뒤러에 이르기까지 대가들의 명품이 빼곡하다. 다들 그 작품의 양과 질에 놀라는 표정이다. 대체 누구의 방이기에 이렇게 많은 미술품으로 가득 차 있을까. 놀랍게도 주인공은 벨기에의 무역상인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다.

후추무역으로 떼돈을 번 이 인물은 자신이 번 돈을 당대 최고의 예술품을 구입하는 데 쏟아부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벌 만큼 벌었으니 이제 명예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족 신분은 원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코르넬리스는 대신 미술품을 매개로 귀족과의 친교를 유지함으로써 그런 명예욕을 간접적으로나마 충족시키려 했다.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귀족들은 명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그와 만나려 했다. 예술품 소장가를 중심으로 하나의 우아한 사교 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네덜란드 바로크 시대의 화가 빌렘 반 해슈트의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의 갤러리를 방문하는 대공’(1628)은 그 ‘현명한’ 인물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고 있는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상인계층의 미술품 수집 풍조는 중국에서도 오래전에 나타났다. 명나라 때 휘주지역의 상인 출신 관료인 왕도곤(汪道昆), 청나라 때 양주지역 소금상인인 강춘(江春) 하군소(河君召) 마왈관(馬曰琯)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 역시 예술품을 매개로 신분을 뛰어넘어 사대부 계층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서 중국의 부상은 중국 정부의 개입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론 돈을 벌면 미술품을 수집해 명예를 추구하려는 중국적 전통도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최근 미술관을 건립해 화제를 모은 상하이 최고의 컬렉터 리우 이치안은 그 단적인 예다. 택시기사로 출발해 금융재벌을 일군 그는 미술품 수집을 통해 명사가 됐다.

오늘날 서구의 슈퍼리치 컬렉터 중 상당수도 이와 비슷한 동기에서 미술품을 사 모은다. 그러나 이런 동기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대개 평범한 컬렉터로 머물 수밖에 없다. 세기의 컬렉터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그런 외형적인 동기보다는 예술품이 좋아서 한두 점 사 모으다가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하게 되고 특정 주제에 몰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들의 탁월한 안목과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이다. 이들은 또한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컬렉션을 타인과 공유하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자신의 남다른 안목을 주변에 과시하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의지도 담겨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현대 컬렉터의 전설은 레오(1872~1947)와 거트루드 스타인(1874~1936) 두 미국인 남매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20세기 초 파리에 거주하면서 작품을 수집했다. 소장품 목록에는 피카소, 마티스, 르누아르는 물론 아방가르드 계열의 신인 작품도 다수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매주 토요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파티를 열고 작품을 공개했는데 소문을 듣고 달려온 수집가, 딜러, 문인, 예술가들로 북적댔다고 한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자선가인 엘리 브레드(80)는 2000여점의 현대 미술품을 보유하고 있는데 질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 뺨칠 정도다. 자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앤디 워홀 등 동시대 최고의 작가 작품이 망라돼 있다. 기펜 레코드 창업자인 데이비드 기펜(69)도 엘리 브레드에 필적할 만한 컬렉션을 갖고 있다.

프랑스의 억만장자 프랑수아 피노(78)는 30년 이상 꾸준히 수집해온 컬렉터의 전설이다. 그가 어떤 작품을 구입하느냐는 늘 세계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가 됐을 정도다. 마크 로스코, 루치오 폰타나, 제프 쿤스 등의 작품 2500여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자신의 작품을 미술관에 대여 전시하는 방식으로 공개한다.

런던 사치갤러러 대표인 찰스 사치 역시 대표적인 현대 미술품 컬렉터다. 일각에선 부도덕한 인물로 지탄받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안목만큼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검증된 작가의 작품보다 가능성 있는 작가의 작품을 사들인다. 그의 소장품을 보면 미술시장의 미래가 보인다고 얘기할 정도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컬렉터인 프란체스카 폰 합스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투자대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영혼을 고양시켜 기성의 사고에 도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런 예술의 위대한 힘을 읽어내는 것. 바로 세기의 컬렉터가 공통적으로 갖춘 덕목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