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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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의 휴대폰 고객 쟁탈전은 ‘영업정지 기간’에도 휴전이 아니다. 영업이 가능한 통신사는 남의 고객을 빼앗아 오기 위해, 영업정지 중인 통신사는 자기 고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혈안이다. 서로 모함하고, 헐뜯는 모습도 연출된다. 한 통신사 영업맨의 가상 독백을 통해 최근 휴대폰 시장의 경쟁 현실을 전한다.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이 15일 오후 서울 테크노마트의 휴대폰 판매점을 찾아 관계자로부터 애로사항 등을 듣고있다. 연합뉴스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이 15일 오후 서울 테크노마트의 휴대폰 판매점을 찾아 관계자로부터 애로사항 등을 듣고있다. 연합뉴스
나는 이동통신회사 영업맨이다. 휴대폰 단말기를 파는 대리점을 관리하고, 새로운 판매망을 구축하고, 뭐 이러는 게 평소 일이다. 요즘 들어 짓궂은 친구들로부터 자주 전화가 걸려 온다. 영업정지 기간이라 팽팽 놀아서 좋겠다고.

음…속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물론 통상적인 업무는 확실히 신경을 덜 쓴다. 잠깐 영업하다가 다시 중단하는 일이 반복돼서다. 그렇다고 노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익숙지 않은 일을 하느라 죽을 맛이다. 적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요새 이 바닥 전쟁터다. 서로 상대방의 불법 행위를 찾아내느라 눈이 빨갛다. 녹음기를 가슴팍에 넣고 몰래 경쟁 회사 대리점을 찾는 건 기본이다. 살살 불법 행위로 유도하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영업사원이 아니라 사설탐정이 된 듯하다. 들키면 어떡하느냐고. 걱정없다. 휴대폰을 진짜로 사버리면 그만이다. 휴대폰 가입하러 들렀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나. 일손이 모자란 곳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기도 한단다. 어떤 휴대폰 대리점 앞에는 ‘경쟁사 아르바이트생 출입 금지’라는 웃지 못할 안내문까지 붙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는 곧바로 위로 보고된다. 결정적인 문서를 손에 넣으면 땡잡은 날이다. 가끔 신문에 나지 않는가. A통신사가 불법 영업을 했다고 B통신사가 정부 당국에 자료를 제출했다는. 그 자료가 어디서 나왔겠나. 다 우리가 긁어모은 거다. 일부에서는 아예 대놓고 대리점을 협박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경쟁 회사의 가입자 유치 실적이 높은 대리점이 타깃이다. 동업자지만 대단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요즘 같이 심하진 않았다. 올 들어 이동통신 3사가 돌아가며 순번제로 찔끔찔끔 영업을 하는 탓에 모두 신경이 곤두섰다.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때 적들이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월 좋던 시절, 통신시장이 마구 커가던 시절, 그때는 대충 넘어갈 수 있었던 일도 이제는 용납이 안 된다.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국내 휴대폰 가입률이 110% 수준이다. 저쪽이 한 명 늘면, 우리가 한 명 줄어드는 살벌한 레이스의 연속이다.

정부가 살짝 신경 쓰이긴 한다. 얼마 전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이통사 최고경영자(CEO)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형사 처벌 운운하자 조직 내에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이통 3사가 정부의 엄포에 화답해 ‘불법 보조금 근절을 위한 공동 선언문’도 내놓았고, ‘적진 정탐’ 지시를 담은 문서들도 사내 게시판에서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공식적인 지시가 은밀한 구두 지시로 바뀌었을 뿐 상황은 그대로다.

정부도 고생이다. 작년 1~3월에 한 회사씩 차례로 영업정지를 시켰다가 오히려 과열 경쟁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자, 올해부터는 ‘두 개 회사 동시 정지’라는 ‘신제품’을 내놨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어 보인다.

아참, 엊그제 미래부 고위 인사가 통신사 임원들을 불러 놓고 상호 비방 그만두라고 따끔하게 혼냈다는데 당분간은 좀 자제해야겠다. 정부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나보다. 방송통신위원장이 나서서 현장점검까지 하는 걸 보니. 하지만 정부가 아무리 인상을 써도 영업 현장은 실적이 우선이다.

요즘은 판매점 사장들로부터 하소연을 듣는 것도 고역이다. “영업정지로 장사는 못하고 통신사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는 푸념,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세상은 왜 이렇게 갈수록 팍팍하게만 돌아가는지…. 오늘 저녁엔 모처럼 경쟁사 김 매니저에게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야겠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