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기 화백의 1986년작 ‘산나물 장수의 아침’.
손상기 화백의 1986년작 ‘산나물 장수의 아침’.
‘물랭루주’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는 10대 시절 추락 사고로 뼈를 다쳐 키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신체장애를 안고 몽마르트르 주변의 창녀, 부랑배 등의 애환을 화폭에 담았다. 3세 때부터 앓은 구루병 탓에 척추만곡(꼽추)이라는 불구의 몸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펼쳤던 손상기 화백(1949~1988)의 삶도 그런 로트레크를 닮아 ‘한국의 로트레크’로 불린다.

평생 병마와 싸우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우며 어느 유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손 화백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는 판화전이 오는 17~28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회 주제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손상기’.

달동네 서민들의 모습을 암울한 톤으로 담아낸
손상기 화백의 석판화 ‘누드X-II’.
손상기 화백의 석판화 ‘누드X-II’.
‘시들지 않는 꽃-아이러니’ ‘누드’ ‘산나물 장수의 아침’ 등 판화 30여점이 걸린다. 첨단 인쇄기술 발달로 다채로운 기법의 판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손 화백이 생전에 직접 제작한 판화 작품은 가난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우다 요절한 그의 삶과 예술을 짐작하게 한다.

궁핍한 삶을 무겁고 어두운 터치로 그려낸 그의 그림들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가난과 신체장애의 이중고를 견뎌야 했던 화가의 삶이 고달팠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대표작 ‘시들지 않는 꽃’ 시리즈는 이런 자신의 처지를 역설적으로 풀어냈다. 이번 전시에서는 ‘시들지 않는 꽃-아이러니’와 ‘시들지 않는 코스모스’를 판화로 만날 수 있다. ‘마른 꽃이지만 결코 시들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여성 이미지를 통해 자전적인 이야기를 표현한 ‘누드’ 시리즈도 여럿 나온다.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 부근에 사글셋방과 화실을 얻어 작업했던 화가는 집 근처 홍등가의 작부를 모델로 누드화를 쏟아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잿빛 여심, 바다보다 깊고 넓은 모성, 욕망의 대상 등 다양한 의미를 녹여낸 그의 누드화는 묘한 울림을 준다.

1986년 제작된 수작 ‘산나물 장수의 아침’도 판화로 나온다. 행상을 하는 여인네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소외된 계층을 리얼하게 포착했다. 기름기 없는 산동네의 애잔한 풍경을 애써 들춰내는 손 화백의 붓질이 날카롭다.

전남 여천 출생으로 원광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손 화백은 1981년 첫 서울 전시회를 계기로 중앙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1983년부터 샘터화랑의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작고할 때까지 매년 전시회를 열어 ‘천재화가’라는 평을 들었다. 그의 작품 ‘고향 풍경 중에서’는 2011년 12월 K옥션 경매에서 1억5000만원에 팔려 자신의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손상기는 인간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