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 사외이사 선임안 '의결권 행사지침' 안지켜
횡령 및 배임 정몽구 회장·구본준 부회장 이사 선임도


국민연금은 올해 정기 주주총회 기간 상당수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며 '거수기' 오명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동시에 국민연금은 올해도 자격 논란이 제기된 인물들을 사내이사로 앉히는 많은 안건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해결한 문제보다 해결해야 할 숙제가 더 많이 남았음을 보여줬다.

전문가들은 7일 국민연금이 투자기업의 경영 방향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면 다른 기관투자자와 힘을 모아 의결권을 행사하는 전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롯데·한진·효성그룹 오너들 이사 선임 반대
올해 국민연금이 이사 선임안에 반대표를 던진 주된 이유는 과도한 겸직에 따라 충실한 임수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데 있었다.

국민연금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여러 계열사의 등기이사로 있는 점을 들어 롯데제과와 롯데쇼핑 이사로 재선임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신 회장의 누나인 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이 롯데쇼핑 이사로 재선임되는 안건도 반대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한진·한진칼·에쓰오일)과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한진·한진칼)의 사내이사 선임안에도 국민연금은 '과도한 겸직'을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효성의 경우 기업가치와 주주 권익이 훼손됐다는 것이 국민연금의 반대 이유였다.

국민연금은 탈세·횡령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범죄를 공모한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겨진 장남인 조현준 효성 사장, 이상운 효성 부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안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후보의 독립성 문제가 거론된 곳도 있었다.

롯데칠성(사외이사·감사)과 롯데케미칼(사외이사) 주총에서는 최근 5년 이내 계열사의 상근 임직원을 지낸 후보의 독립성 취약 문제를 내세워 국민연금은 반대했다.

BNP파리바가 주요 주주로 있는 신한금융지주는 필립 아기니에 BNP파리바 아시아리테일부문 본부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려다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국민연금의 반대표를 받았다.

◇ 올해도 '거수기' 오명서 자유롭지 못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과거보다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올해도 여전히 반대표를 던질 만한 안건 상당수에 거수기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예를 들어 지난달 14일 일제히 개최된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중공업 등 삼성그룹 계열사 주총에서 국민연금은 이들 회사가 올린 모든 안건에 대해 찬성표를 행사했다.

특히 국민연금은 지난 2월 의결권 행사지침 개정안에서 사외이사 선임 때 이사회 참석률 기준을 현행 60%에서 75%로 상향 조정해 놓고도, 이 기준에 못 미치는 참석률을 보인 정종섭 삼성생명 사외이사 신규선임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주총 전부터 논란이 됐던 일부 기업의 등기이사 선임안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은 찬성표를 행사했다.

지난 2008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유죄 판결을 받은 정몽구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는 현대자동차의 주총 안건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은 올해 찬성 의견을 냈다.

구본준 LG전자 부회장과 지배주주 일가는 LG석유화학 지분을 저가로 매입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약 8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강유식 LG전자 부회장은 지난 2004년 정치자금법 위반 행위로 기소돼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지난달 LG전자 주총에서 이 같은 전력의 구 부회장과 강 부회장을 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 '혼자서는 어렵다'…기관 간 협력 필요성 대두
국내 증시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 투자 지분이 10% 이상이면 매매 현황을 일일이 보고해야 했던 '10% 룰'이 완화되면서 국민연금은 더욱 공격적으로 주식 투자에 나선 상황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단일 주주 기준으로는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주총에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기에는 지분이 부족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영향력 있게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다른 기관들과 공조할 필요성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대기업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주총에서 반대표를 행사해 대기업의 경영에 간섭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나마 국내 자산운용사 중에서는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꼽힌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CGS)과 트러스톤자산운용에 따르면 올해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사회책임투자(SRI) 펀드에 편입한 기업 178개사의 안건 366건 중에서 31건(8.5%)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하고 2건에 의결권 불행사를 했다.

특히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중요 이해관계자의 특수관계인이거나 장기로 연임한 이사와 감사 선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 이사 선임안과 효성의 조석래 회장·조현준 사장의 이사 선임안에도 반대의견을 냈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해외 연기금은 다른 기관 투자자와 의결권을 연대 행사하는 전략을 활용함으로써 더욱 영향력 있는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다"며 "국민연금도 이런 전략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김남권 배영경 기자 ykb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