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국가산단 40년] 중화학공업 혁신 이끈 40년, 대한민국 창조경제 이끌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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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산단 걸어온 길
창원국가산업단지는 정부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1972~1976년) 계획 목표인 ‘중화학공업 국제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계공업 100억달러 수출, 1980년대 선진공업국 대열 안착’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탄생했다.
당시 정부는 지리적으로 부산, 대구와 인접하고 동남해안을 따라 포항, 울산, 광양을 잇는 남동임해안 공업벨트의 중심지로 창원을 선택하고 여기에 종합기계공업기지를 건설키로 했다.
이는 1971년 달러 금교환 정지 등의 달러방어정책에 따른 ‘닉슨 쇼크’와 1973년 석유파동 등에 따른 세계경제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로 삼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핵심적 사업이기도 했다.
1973~1979년 창원종합기계공업 건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3년 연두회견에서 중화학공업을 선언하고 그 해 9월 창원기계공업기지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듬해 4월 정부는 창원을 종합기계공업기지 개발을 위한 산업기지개발촉진지역으로 확정하고 남산동 일대 제1단지 조성 사업을 시작으로 총 1650만㎡ 규모의 공업용지 조성을 추진했다. 1974년 4월 한국기계공업공단을 발족하고 창원공업기지 입주 업체 선정 작업과 다원적인 입주 혜택 등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펼쳤다. 1975년 밸브 생산업체인 부산포금(현 PK밸브)을 시작으로 1978년 금성사, 대우중공업, 기아기공, 한국종합특수강, 삼성중공업, 효성중공업 등이 가동에 들어갔다.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인 창원은 현재의 창원대로(13.5㎞)를 중심으로 남측은 산업단지(2475만㎡), 북측은 배후 도시(2805만㎡)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0~1989년 시련과 발전 거듭한 창원산단
1979년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 경기 후퇴의 영향으로 1980년대 초 창원국가산업단지 입주업체들도 수주 감소와 판매 부진에 따른 자금난으로 조업 중단, 휴업, 체임, 부도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시련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른바 ‘3저(저달러, 저유가, 저금리)’로 불리는 경기 호전과 공작기계, 자동차 및 각종 부품 소재의 꾸준한 국산화와 함께 관련 산업의 투자 증가에 힘입어 창원산단은 1986년 무역흑자 원년을 기록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노조 결성과 노사분규의 급증으로 한때 성장세가 주춤하기도 했지만 VTR, 반도체 등 해외수요증가에 따른 설비 자동화, 기계류, 첨단제품 개발 등으로 1989년 생산 5조237억원, 수출 14억2800만달러를 기록하면서 국가 산단조성 전인 1970년대에 비해 생산과 수출이 1000%와 765% 늘어나는 급성장을 이룩했다.
이 시기의 창원은 도시 발전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 1980년 4월1일에 창원시가 개청됐고 1983년 7월1일에 경남도청이 창원시에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했다.
1990~1999년 기계산업의 고성장
1990년대 초반 창원산단은 중화학공업의 핵심을 이루는 기계산업의 안정적 내수 증대와 지속적인 수출 신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 기계산업 비중은 1990년대 국민총생산(GNP)의 10.1%, 제조업 생산의 22.5%를 넘어섰고 특히 전체 수출의 23.9%를 차지했다. 기계산업의 이 같은 성장에 힘입어 창원산단의 입주기업 수는 1990년 315개사에서 1999년 898개사로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노사 간 산업 평화 분위기 조성과 정부의 첨단 산업 육성 및 기계 부품 국산화 시책 등이 맞물리면서 창원산단은 1990년대 초 생산 6조원, 수출 14억달러에서 1990년대 말에는 생산 16조5000억원, 수출 56억달러라는 초고속 성장을 기록했다.
이 같은 폭발적인 증가세에도 불구하고 고용만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1980년 8만84명에서 1989년 7만500명으로 1만여명 줄어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2000~2013년 산업구조 융복합·고도화 시도
국내 중화학공업의 획기적 발전을 선도해온 창원산단은 21세기 글로벌 경쟁체제로 진입하면서 기존 굴뚝산업에서 디지털·정보화 시대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통산업과 IT산업이 결합된 ‘e-클러스터사업’과 경쟁국에 비해 2배 이상 물류비를 부담하고 있는 낙후된 물류체계 개선을 위해 물류정보시스템 구축, 영세 중소기업의 창업기반 제공을 위한 아파트형 공장의 지속적 공급 등을 통한 산업구조 고도화와 고부가가치화를 추진했다.
산업단지 혁신클러스터 사업을 통해 기업의 혁신을 유도하고 지역전문가들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도록 대학, 연구소 등 지원 기관과의 네트워크도 구축해 나갔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입주기업이 1000개사를 넘겼고 2013년 말에는 2390개사를 기록했다. 생산은 2001년 20조원을 넘겨 2013년에는 49조9766억원, 수출은 2005년 114억8500만달러를 기록해 100억달러를 넘어섰고 지난해 198억7300만달러를 달성했다.
창원산단은 1724만6000㎡ 규모의 산업 용지의 분양을 최근 완료하는 등 새로운 산업 환경 변화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산업단지 구조 고도화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창원=강종효 기자 k123@hankyung.com
창원국가산업단지는 정부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1972~1976년) 계획 목표인 ‘중화학공업 국제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계공업 100억달러 수출, 1980년대 선진공업국 대열 안착’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탄생했다.
당시 정부는 지리적으로 부산, 대구와 인접하고 동남해안을 따라 포항, 울산, 광양을 잇는 남동임해안 공업벨트의 중심지로 창원을 선택하고 여기에 종합기계공업기지를 건설키로 했다.
이는 1971년 달러 금교환 정지 등의 달러방어정책에 따른 ‘닉슨 쇼크’와 1973년 석유파동 등에 따른 세계경제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로 삼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핵심적 사업이기도 했다.
1973~1979년 창원종합기계공업 건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3년 연두회견에서 중화학공업을 선언하고 그 해 9월 창원기계공업기지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듬해 4월 정부는 창원을 종합기계공업기지 개발을 위한 산업기지개발촉진지역으로 확정하고 남산동 일대 제1단지 조성 사업을 시작으로 총 1650만㎡ 규모의 공업용지 조성을 추진했다. 1974년 4월 한국기계공업공단을 발족하고 창원공업기지 입주 업체 선정 작업과 다원적인 입주 혜택 등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펼쳤다. 1975년 밸브 생산업체인 부산포금(현 PK밸브)을 시작으로 1978년 금성사, 대우중공업, 기아기공, 한국종합특수강, 삼성중공업, 효성중공업 등이 가동에 들어갔다.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인 창원은 현재의 창원대로(13.5㎞)를 중심으로 남측은 산업단지(2475만㎡), 북측은 배후 도시(2805만㎡)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0~1989년 시련과 발전 거듭한 창원산단
1979년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 경기 후퇴의 영향으로 1980년대 초 창원국가산업단지 입주업체들도 수주 감소와 판매 부진에 따른 자금난으로 조업 중단, 휴업, 체임, 부도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시련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른바 ‘3저(저달러, 저유가, 저금리)’로 불리는 경기 호전과 공작기계, 자동차 및 각종 부품 소재의 꾸준한 국산화와 함께 관련 산업의 투자 증가에 힘입어 창원산단은 1986년 무역흑자 원년을 기록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노조 결성과 노사분규의 급증으로 한때 성장세가 주춤하기도 했지만 VTR, 반도체 등 해외수요증가에 따른 설비 자동화, 기계류, 첨단제품 개발 등으로 1989년 생산 5조237억원, 수출 14억2800만달러를 기록하면서 국가 산단조성 전인 1970년대에 비해 생산과 수출이 1000%와 765% 늘어나는 급성장을 이룩했다.
이 시기의 창원은 도시 발전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 1980년 4월1일에 창원시가 개청됐고 1983년 7월1일에 경남도청이 창원시에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했다.
1990~1999년 기계산업의 고성장
1990년대 초반 창원산단은 중화학공업의 핵심을 이루는 기계산업의 안정적 내수 증대와 지속적인 수출 신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 기계산업 비중은 1990년대 국민총생산(GNP)의 10.1%, 제조업 생산의 22.5%를 넘어섰고 특히 전체 수출의 23.9%를 차지했다. 기계산업의 이 같은 성장에 힘입어 창원산단의 입주기업 수는 1990년 315개사에서 1999년 898개사로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노사 간 산업 평화 분위기 조성과 정부의 첨단 산업 육성 및 기계 부품 국산화 시책 등이 맞물리면서 창원산단은 1990년대 초 생산 6조원, 수출 14억달러에서 1990년대 말에는 생산 16조5000억원, 수출 56억달러라는 초고속 성장을 기록했다.
이 같은 폭발적인 증가세에도 불구하고 고용만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1980년 8만84명에서 1989년 7만500명으로 1만여명 줄어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2000~2013년 산업구조 융복합·고도화 시도
국내 중화학공업의 획기적 발전을 선도해온 창원산단은 21세기 글로벌 경쟁체제로 진입하면서 기존 굴뚝산업에서 디지털·정보화 시대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통산업과 IT산업이 결합된 ‘e-클러스터사업’과 경쟁국에 비해 2배 이상 물류비를 부담하고 있는 낙후된 물류체계 개선을 위해 물류정보시스템 구축, 영세 중소기업의 창업기반 제공을 위한 아파트형 공장의 지속적 공급 등을 통한 산업구조 고도화와 고부가가치화를 추진했다.
산업단지 혁신클러스터 사업을 통해 기업의 혁신을 유도하고 지역전문가들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도록 대학, 연구소 등 지원 기관과의 네트워크도 구축해 나갔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입주기업이 1000개사를 넘겼고 2013년 말에는 2390개사를 기록했다. 생산은 2001년 20조원을 넘겨 2013년에는 49조9766억원, 수출은 2005년 114억8500만달러를 기록해 100억달러를 넘어섰고 지난해 198억7300만달러를 달성했다.
창원산단은 1724만6000㎡ 규모의 산업 용지의 분양을 최근 완료하는 등 새로운 산업 환경 변화를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산업단지 구조 고도화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창원=강종효 기자 k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