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무역 한국'이 해운을 포기할 수는 없다
세계 1~3위 해운사가 뭉친 거대 해운동맹 ‘P3 네트워크’의 출범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겨졌던 미국 연방해사위원회로부터 승인을 얻어 2분기 내 출범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P3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머스크라인(덴마크), MSC(스위스), CMA-CGM(프랑스)은 세계 해운물류의 40%를 점하는 빅3다. 유럽연합(EU) 한국 중국 등 경쟁당국의 승인이 남아있지만 당장 미주, 유럽 물량만으로도 해운시장에 쓰나미를 몰고 올 전망이다.

P3의 등장은 6년째 불황으로 숨이 턱에 찬 국내 해운업계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국내 해운사들의 주력 컨테이너선이 8000TEU급인 데 비해, 빅3는 1만8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띄운다. 더구나 이들은 수익과 직결되는 연료비를 30% 이상 절감하는 첨단 에코십으로 무장했다. 이미 양적·질적으로 경쟁이 버거운데 유럽 강자들끼리 똘똘 뭉쳐 선박·항만·노선을 공유하며 비용을 더 낮춘다니 국내 해운사들은 사활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내 해운사들이 경기가 살아나 물동량이 늘어나더라도 자생적인 회복이 어렵다는 점이다. 국내 1, 2위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신용등급은 투기등급 경계선인 BBB-, BB+까지 떨어졌다. 부채비율은 무려 1400% 안팎이다. 자체 신용으로 회사채 발행을 못 하는 것은 물론, 만기물량의 차환도 걱정이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3위 STX팬오션과 중소형 선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신규 선박 발주는커녕 배를 팔아 연명하는 꼴이다.

해운산업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해운사들의 빗나간 경영판단도 컸다. 2003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7년 해운 호황에 도취해 위기 대비에 소홀히 한 결과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도 운임지수(BDI) 상승세만 보고 앞다퉈 선박 투자를 늘렸다. 그 결과가 2008년 5월 사상 최고인 1만1793까지 치솟았던 BDI가 리먼 사태가 터지고 불과 6개월 새 663까지 급전직하로 추락한 것이다.

해운업은 주식처럼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국내 해운사들은 거꾸로 비쌀 때 사서 쌀 때 처분하고 있다. 현재 1600대인 BDI로는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니 초대형 선박, 그린해운 경쟁은 엄두도 못 낸다.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어 세계 5위 해운강국이란 말이 무색하다. 지금 해운업은 치킨게임에 몰입하고 있다. P3는 전쟁동맹인 셈이다. 벼랑 끝에 매달린 한국의 해운업 붕괴는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역 한국’을 유지하는 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해운산업이다. 수출입 물량의 99.7%를 실어나르는 해운산업이 무너지면 수출 경쟁력을 장담하기 어렵다.

덴마크 중국 등은 자국 해운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해운업은 각국 정부와 업계의 2인3각 경주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가 해운업계를 지원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해운보증기금 5500억원으로 최대 20배(11조원)를 보증해준다 해도 초대형 선박 한 척에 조 단위 투자가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한참 모자란다. 기금 규모를 늘리고 정책금융기관을 통한 신용보강을 해달라는 하소연을 마냥 외면하기 어렵다. 경영판단 미스에 대한 책임과 철저한 자구노력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벼랑 끝에 매달린 해운업이다. 일단 살려놓고 따져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