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지고 이겨라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언니 오빠(조현아·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를 비롯한 손주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막내 손녀로서의 일종의 특권(?)을 누리며 더 큰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동화책보다 더 재미난 이야기들 때문이었는지 난 유독 할아버지를 따랐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할아버지의 수많은 이야기가 오늘날 나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음을.

해방 직후부터 물류사업을 시작하셨던 나의 할아버지는 현재 한진그룹의 모태인 한진상사를 창업한 고(故) 조중훈 회장이다. 캔맥주 수송으로 한진상사를 반석에 올려놓은 할아버지의 도전은 끝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1956년 주한미군 전체에 군복 등 군수물자 납품 계약을 성사시켰다. 당시 군수물자 수송 과정에서 도난사건이 너무 많아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결국 1959년 모두가 걱정하던 사건이 터졌다. 미군 군수물자 수송을 맡았던 하청업체 트럭 운전사가 미군 겨울 방한복을 모두 훔쳐 다른 곳에 팔아버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건을 해결했다.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3만달러를 빌려 시장을 샅샅이 뒤져 도난당한 방한복 1300벌을 되사 미군에 전달했다. 도난 신고를 하거나 운전사에게 책임을 넘기는 대신 3만달러 빚을 떠안은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난 할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건 경위를 미군에 설명했으면 변상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내 말씀하셨다. “지고 이겨라.” 3만달러의 빚을 떠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납품이라는 약속 이행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할아버지가 항상 읊조리고 제일 좋아하셨던 철칙 ‘지고 이겨라’. 일에는 선후가 있고 선후를 분간해야 상대방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미군은 사건 후 모든 사실을 알게 됐고 한진상사에 대한 믿음이 더없이 커졌다고 했다. 믿음을 바탕으로 계약을 이어간 한진상사는 매년 세 배 이상 성장했다. 트럭 30대로 시작한 미군 물자수송 사업은 어느덧 500대까지 늘어났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멀리, 그리고 오래가려면 단기간의 이익보다 신뢰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지고 이기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조현민 < 대한항공 전무·진에어 전무 emilycho@koreanair.com >